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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의 ‘다양성 지우기’

매거진

by issuemaker 2025. 4. 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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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의 ‘다양성 지우기’

대기업 200곳 DEI 언급 삭제
다양성 물결 이끌던 디즈니조차 전향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뒤 한편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위기에 대한 피로감도 번지고 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행정부의 반(反)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기조에 따라 주요 대기업들과 문화계가 정책 기조에 발을 맞추는 분위기다.

 

ⓒThe White House/Flickr


2차 대전 상징 ‘이오지마 사진’ 삭제
미국 국방부는 최근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오지마의 성조기’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삭제했다. 대원 중에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병사였던 아이라 해밀턴 헤이스가 있다는 점이 삭제 배경으로 지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척결에 나선 가운데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도 고귀한 전쟁’으로 불리는 이오지마 전투의 역사 기록까지 지운 것이다. AP의 종군기자 조 로즌솔이 찍은 이 사진은 1945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진을 삭제한 이유는 원주민 출신 해병대원이 포함됐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미국 국방부는 현재 DEI 정책을 연상시키는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삭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부 웹사이트에 게재된 DEI 관련 기사와 SNS 게시물, 비디오 영상 등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관할하에 있는 여러 웹사이트에서 유색인종, LGBTQ, 여성 및 소수자들의 역사와 미군에 대한 기여를 기록한 수천 개의 페이지를 삭제했다. 문제는 여기에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이자 참전용사인 재키 로빈슨의 이력도 포함됐다는 점이다. 로빈슨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20세기 중후반 스포츠계에서 흑인 인권 운동을 펼친 상징적인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뒤 야구계에 뛰어들어 메이저리그(MLB)에 데뷔했다.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이자 은퇴 후에도 흑인 인권 운동을 펼치는 등 기여를 인정받으며 MLB 역사상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 선수로 남아 있다. 비판이 일자 로빈슨의 자료는 다시 복구된 상태다.

 

미국 국방부는 최근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오지마의 성조기’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삭제했다. ⓒJoe Rosenthal/Wikimedia Commons


  지난 1월 취임과 함께 연방 정부 기관의 DEI 프로그램을 모두 폐지했고, 취임 후 50일 동안 총 15개의 DEI 관련 행정명령을 발동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흑인 합참의장인 찰스 브라운 장군을 전격 경질했고, 미국 최초의 여성 해군참모총장인 리사 프란체티 제독을 포함한 군 수뇌 다섯 명에 대한 교체도 지시했다. 미군에서 인종·성별에 따라 소수자를 배려하는 정책도 없앴다. 현역 복무 중인 1만 4,000여 명의 성전환 군인에 대한 강제 전역과 추후 입대 금지도 추진 중이다.

주요 기업, DEI 줄줄이 없애
미국의 주요 기업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 DEI 기조에 부응해 연례 보고서에서 관련 용어에 대한 언급을 줄이거나 지운 것으로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회계연도가 종료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상위 400대 기업을 자체 분석한 결과, 90% 이상이 연례 보고서에서 DEI 정책과 관련된 항목 또는 용어를 삭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소 360곳 이상이란 얘기로 이 가운데 200곳 이상은 대기업인 것으로 조사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인 2021~2024년 DEI 관련 조항을 일부 삭제한 곳이 20개에 그친 것과 대비된다.

디즈니 산하 픽사의 오리지널 시리즈 ‘이기거나 지거나’의 트랜스젠더 스토리 라인을 삭제한 것을 두고도 DEI 정책과 거리 두기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디즈니+

  해당 기업들은 연례 보고서에 직원을 인종별로 분류한 통계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흑인 전문가 네트워크나 DEI 이니셔티브 등과 같은 내부 관련 그룹에 대한 언급도 삭제했다. 일부 회사는 DEI 프로그램을 아예 폐지하기도 했다. DEI 대신 ‘소속감’, ‘모든 직원이 성공하는 문화’ 등으로 표현 방식을 바꾼 곳도 있다. 더 나아가 “실력주의는 인재 개발의 핵심”이라고 적은 모건스탠리처럼 DEI 관련 언급을 삭제하고 실적 기반 채용을 강조한 곳도 있었다. 시스코의 경우 척 로빈스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월 DEI 이니셔티브를 확고하게 옹호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연례 보고서에선 관련 언급을 삭제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연방 정부와 계약한 기업에 DEI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토록 요구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과 무관치 않은 행보라는 분석이다. 정부와 거래하는 기업은 자칫 연례 보고서에 DEI 프로그램 관련 내용을 기재했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어서다. 메타 역시 여성, 히스패닉, 장애인 등의 직원 비율을 50%까지 높이겠다고 발표했다가 재검토하기로 했다. 다만 애플과 스타벅스, 코스트코 등은 주주총회 투표 결과에 따라 DEI 프로그램을 유지키로 하면서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최근 영화 ‘위키드’에 흑인 여배우 신시아 에리보가 ‘예수’ 역으로 캐스팅되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The White House/Flickr


보수화되는 할리우드
DEI 정책 폐기 기조는 문화계 전반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이를 발 빠르게 수용한 기업 중 하나는 세계 최대의 미디어 기업 디즈니다. 디즈니는 임원 보상 평가 기준 중 하나였던 ‘다양성 및 포용성 성과’를 없애고 비즈니스 성공에 중점을 둔 ‘인재 전략’을 추가했다. 다양성 정책 차원에서 마련된 소외 계층을 위한 이니셔티브와 관련 웹사이트도 폐쇄했다.

  고전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경고문에서도 디즈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인종차별 표현이 있는 작품에 ‘특정 인물이나 문화에 대한 부정적 묘사 또는 부적절한 대우가 포함돼 있다’는 사전 경고문을 표시해 온 디즈니는 이를 지웠다. 또한 디즈니 산하 픽사의 오리지널 시리즈 ‘이기거나 지거나’의 공개를 앞두고 트랜스젠더 스토리 라인을 삭제한 것을 두고도 DEI 정책과 거리 두기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앞서 디즈니는 2022년 ‘라이트이어’와 ‘스트레인지 월드’ 등에 성소수자 캐릭터를 포함했다가 보수단체의 반발을 산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오랫동안 할리우드의 다양성 바람을 이끄는 ‘선두주자’ 역할을 했던 디즈니와 행보와는 정반대의 움직임이다. 그간 디즈니는 인종과 성별 종교 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배척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조해왔는데, 과도한 PC주의가 디즈니 원작이 가진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우려를 지속해서 받아왔다. 특히 지난 2023년 실사화된 ‘인어공주’에서 빨간 머리에 백인이던 주인공 애리얼 역에 흑인 가수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미국 주요 도시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YTN 뉴스화면 갈무리


  정책 폐기는 브로드웨이로도 확산하는 중이다. 영화 ‘위키드’의 주인공을 맡았던 흑인 여배우 신시아 에리보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예수’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논란이 일어나면서다. 197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작품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주를 다룬 작품으로, 2018년 흑인 가수 존 레전드가 예수를 연기한 적은 있으나 ‘흑인 여성’으로서는 에리보가 최초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캐스팅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진영 대립 양상으로도 번졌다.

  워싱턴DC에서 공연예술의 산실 역할을 해온 케네디센터도 역시 정책 폐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드래그 퀸(여장 남성)’ 공연을 진행한 케네디센터의 이사진을 축출하고, 트럼프가 직접 이사장 자리에 앉으면서 케네디센터 운영 전반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관측이 흘러나온다. 실제로 성소수자 합창단 공연이 취소되는 등 변화의 몸살도 앓고 있다. 예술가들이 항의의 표시로 성명을 내거나 행동에 나서며 후폭풍도 거센 상태다. 미술계에서도 워싱턴DC 국립미술관(NGA)이 기조에 따라 DEI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소관 사무실을 폐쇄하는 등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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