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다운’ 방식의 감독 선임 과정이 아시안컵 실패 불러왔다는 지적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경질 후 100일 넘게 정식 감독 선임 못 해
오랜 시간 아시아 맹호의 위용을 떨쳤던 한국 축구가 이제는 주변국들의 견제도 받지 않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올해만 해도 지난 2월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에서 조별리그부터 졸전을 거듭하다 준결승전에서 요르단에 완패하며 64년 만의 정상 도전에 실패하더니 4월에는 AFC 23세 이하(U-23) 아시안컵 8강 탈락으로 9회 연속 이어온 올림픽 본선 진출 역사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
AFC 아시안컵은 한국 축구의 숙원이었다. 명실상부한 대륙 최강자를 결정하는 무대인 이 대회에서 대표팀은 1960년 이후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라이벌 일본이 무려 4차례나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최강자의 자리를 굳히는 동안 한국 축구는 첫 2개 대회 우승 이후 늘 도전자에 머물렀다. 손흥민(토트넘)과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PSG) 등 역대 최고 멤버를 보유한 이번 대회에는 기대감이 특히 컸지만,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의 부실한 지도력으로 ‘참사’를 맞아야 했다.
이어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 대표팀도 U-23 아시안컵 8강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에 충격의 패배를 당하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40년 만에 올림픽 본선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이를 두고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전력강화위원회가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감독을 구하지 못해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 황선홍 감독을 임시로 선임하며 황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에 100% 집중하지 못하는 악수가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국 축구가 급격하게 무너진 데는 정몽규 회장을 중심으로 한 대한축구협회의 후진적 운영 때문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정몽규 아웃’을 외치는 팬들은 물론, 최근 한국축구지도자협회도 “축구 지도자들은 지금의 한국 축구가 유례없는 대위기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처럼 반복되는 참사의 근본적 원인에는 대한축구협회 회장 및 집행부의 졸속 행정과 오로지 위기만 모면하려는 단기 처방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고 밝혔다. 이어 “중장기적 발전 계획은 무시한 채 오직 대표팀 성적에만 급급한 결과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져야 할 책임을 몇몇 지도자에게만 전가하고 있는 축구협회의 무책임한 태도를 규탄한다”고 덧붙였다.
잇단 축구 외교 참사
2021년 정몽규 회장은 3선에 성공하며 자신의 임기를 2024년까지 늘렸다. 3기 집행부를 열면서 정 회장은 지난 8년 동안 무너진 한국 축구 외교력 회복에 방점을 뒀다. 2009년까지 대한축구협회장으로 활약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FIFA 부회장으로 다년간 활약하며 국제축구계의 거물로 군림한 것과 달리, 정 회장은 2019년 FIFA 평의회 위원 만기를 끝으로 국제축구에서 어떤 직책도 맡지 못했다.
이에 협회는 2022년 중국이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반납한 2023년 아시안컵 개최권 획득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주요 대회가 중동에서 잇달아 개최되는 흐름을 바꿔 아시아 축구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에, 반세기 넘게 정상에 서지 못한 한국이 홈에서 트로피를 드는 실리적 이득을 얻겠다는 의도였다. 윤석열 정부도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와 더불어 적극적인 관심을 쏟으며 아시안컵의 한국 개최를 후방 지원했다. 하지만 2022년 10월 발표된 아시안컵 개최권은 카타르에 손쉽게 넘어갔다. 4개월 후에는 AFC 총회에서 치른 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 정 회장이 재출마했지만 7명 중 6위에 그치며 2연속 평의회 진입에 실패했다.
한 달 후에는 또 한 번의 헛발질을 한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념해 국내 축구인들의 통합을 위한다며 대대적인 사면을 선포한 것이다. 문제는 이 사면 대상에 과거 축구계를 뒤흔들었던 승부조작 사범까지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거센 여론의 반발에 기습 사면은 철회됐지만, 정 회장의 연이은 무리수는 2024년으로 끝나는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한 행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실제 한국 축구의 업적을 정 회장 개인의 공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시작됐는데, 대한축구협회는 2021년 7월 각급 대표팀 감독 선임과 관리 주체인 전력강화위원회를 관련 업무에 대해 조언을 하는 객체로 전환하는 정관 개정을 진행했다. 사실상 전력강화위원회를 거수기로 만들고, 정 회장의 의중에 따라 감독을 선임하는 ‘톱다운’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결국 클린스만 감독의 선임과 관리, 또 해임에 이르는 과정이 정몽규 집행부가 대한축구협회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만천하에 공개된 셈이다.
한편 축구 국가대표팀은 황선홍 감독에 이어 김도훈 감독에게 임시 사령탑을 맡겨 월드컵 예선을 치른다. 클린스만 감독이 경질된 이후 3개월이 넘도록 제대로 된 정식 감독조차 선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협회의 행정력과 외교력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전력강화위는 임시 감독 체제로 급한 불부터 끈 후 유럽 시즌이 끝난 뒤 폭넓게 후보군을 다시 추려 정식 감독 선임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협회와 전력강화위에 대한 불신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감독을 선임하는지 지켜보겠다’는 팬들의 날 선 반응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4선 도전 본격화하는 정몽규 회장
일각에선 스포츠 단체의 회장을 기업체 수장들이 맡던 관례가 재점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대한축구협회처럼 막대한 규모의 예산 대부분이 회장 출연금이나 회장 유관 기업의 기여 없이 무탈하게 운영될 수 있는 단체라면 더욱 그렇다. 2024년 대한축구협회 예산 1,876억 원 중 축구종합센터 건립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한 일반예산은 1,021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거센 비난 속에서도 정몽규 회장은 4선 도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5월 1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에서 정 회장은 AFC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AFC 집행위원회는 AFC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AFC 회장과 5명의 부회장, 각 지역 연맹에 할당된 쿼터에 따라 선출된 집행위원들까지 총 30명으로 구성된다. 동아시아에는 6장의 집행위원 쿼터가 배정되는데, 이번 총회를 통해 비어 있던 한 자리를 정 회장이 차지했다. 정 회장은 단독으로 출마해 AFC 정관에 따라 투표 없이 추대로 선임됐다.
축구계에서는 이를 두고 정 회장의 4선을 위한 초석으로 분석한다. 집행위원의 임기는 2027년까지로 3년이나 남아 있지만 정 회장의 협회 임기는 2025년 1월 종료된다. 협회장직을 내려놓고 AFC 집행위원으로 일하는 그림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정 회장이 4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협회 정관에 따르면 회장 임기는 4년이며,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다만 임원은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임 횟수 제한의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정 회장은 이미 2021년 이 절차를 밟아 3선에 성공했다. 4선을 위해서는 또 체육회 스포츠공정위권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우리 공정위가 내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잘 판단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표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AFC 집행위원에 추대되면 체육회에서도 그의 4선 도전에 제동을 거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축구계 대다수 관계자도 정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정 회장의 레이스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더는 추락할 곳이 없어 보이는 한국 축구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소식이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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