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
신임 최고경영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은 ‘반도체 슈퍼 을(乙)’로 불린다. 대체 불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1984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설립된 이 작은 회사가 유럽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테크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최근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페터르 베닝크의 역할이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 유산을 받아 새롭게 CEO에 임명된 크리스토프 푸케에게 주어진 과제와 기대도 큰 상황이다.
시가총액 기준 유럽 3위 기업
ASML은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서 독보적 기술을 갖춘 제조 기업이다. 유럽은 물론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 등 60곳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EUV를 이용하면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에 5nm 이하의 극도로 미세한 회로를 새겨 넣을 수 있다. 이전 세대 기계가 굵은 마커 펜으로 회로를 그렸다면, ASML 제품은 가는 아이라이너로 미세한 회로를 새길 수 있어 실리콘 웨이퍼에 더 많은 요소를 넣게 된다. 반도체 제품이 이처럼 세밀하고 많은 구성을 갖춘 부품을 가지게 되면 동일한 크기로 더 많은 처리 능력을 갖출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ASML의 장비는 고성능 반도체 제조를 위한 필수 장비로 여겨진다. 그래서 미국 인텔과 한국 삼성, 대만의 TSMC 등 세계 3대 반도체 제조 기업이 ASML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대당 가격이 수천억 원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한 대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반도체 슈퍼 을’이라는 별칭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근에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AI)의 부상으로 핵심 부품인 반도체가 더욱 중시되며 기업가치도 오르고 있다. 지난 3월 말 기준 시가총액은 3,818억 달러로 덴마크 제약업체 노보노디스크, 프랑스 명품 기업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에 이은 유럽 3위 기업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ASML이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자 대기업 필립스와 ASM인터내셔널의 합작 투자로 시작되었는데, 첫 제품의 실패로 경영이 어려워져 필립스와 네덜란드 정부, 유럽연합(EU)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 흔들림 없는 투자를 이어나가며 성공의 초석을 다져나갔고, 1995년 미국 뉴욕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상장된 뒤 EUV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기술이 반도체 제조의 미래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경쟁 기업들이 투자를 꺼렸음에도 EUV를 고집했다. 2006년 첫 견본 기계가 나와 검증을 위해 벨기에의 연구기관에 맡긴 뒤, 이로부터 12년 뒤인 2018년 마침내 상용화에 성공했다. 미국 터프츠대 크리스 밀러 교수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발간하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서 “개발 과정이 너무 길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누구도 EUV에 내기를 하지 않았다”며 “(ASML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에 투자하려는 완강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기업 성장 이끈 페터르 베닝크 CEO 물러나
EUV를 바탕으로 ASML의 덩치는 급격하게 커졌다. 지난해 회사가 올린 연간 매출은 290억 달러에 달한다. 10년 전에 비해 4배 넘게 늘어난 규모다. 2014년 13,000명이었던 직원이 현재 43,000명으로 늘어났다. ASML의 그간의 성과에는 페터르 베닝크 전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 컸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베닝크가 ASML을 이끈 10년간 매출을 비롯한 경영 성과, 반도체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베닝크 전 CEO는 회계학을 전공한 ‘재무통’이다. 딜로이트에서 회계사로 약 20년간 일했던 그는 ASML의 최고재무책임자(CFO)로 합류한 뒤 산업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남다른 책임감을 발판으로 2013년 CEO 자리에 올랐다.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도체 기업이 회계사 출신을 수장으로 앉힌 것을 두고 당시만 해도 다소 이례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역시 자신이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CEO 직을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술 분야 총괄 책임자를 두는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면서 ASML 대표로 취임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베닝크가 산업의 흐름을 짚는 탁월한 안목과 판단력, 그리고 남다른 책임감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최근 ASML 대표이사 퇴임을 계기로 이뤄진 인터뷰에서 “저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랐다”며 “그 책임감은 제 인생의 공통분모”라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 내에서도 항상 책임감을 느꼈다”며 “회사가 성장했지만 고객, 직원, 공급 업체를 우선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을 때도 내 머릿속은 오로지 ASML의 이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과도 친분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ASML의 일부 지분을 보유하기도 했었는데, 베닝크는 2022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관련해 “(이 회장과) 수년간 교류하고 만나며 친분을 쌓았으며 비즈니스, 사업 환경, 개인사 등 광범위한 대화를 나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정학적 긴장 속 새로운 도전 맞닥뜨린 ASML
베닝크가 물러난 ASML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리고 있다. 미국이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에 대한 제재 수위를 갈수록 높이고 있어서다. 전체 매출의 30~40%가 중국에서 나오는 ASML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간 베닝크는 미국 측 요구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 왔다. 중국에 대한 수출 통제는 결국 중국의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국산화를 이끌게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여파로 실적 개선도 필요해진 상황이다. ASML의 올해 1분기 매출은 52억 9,000만 유로로 작년 4분기 대비 27% 감소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도 12억 2,000만 유로를 기록해 전 분기 대비 약 40% 급감했다.
이러한 상황 속 부임한 크리스토프 푸케 CEO에게는 기업의 지배적 시장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중책이 주어졌다. 로이터 푸케 CEO의 취임에 대해 “그가 유럽 최대의 기술 회사를 이끄는 동시에 경쟁자들에 대한 그룹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현재의 인공지능(AI) 열풍에 대응해야 하는 까다로운 균형 조치에 직면해 있다”며 “그는 수익성이 뛰어나고 업계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잠재적 리스크가 있는 기업을 물려받았다”고 평가했다.
푸케 CEO는 DUV(심자외선) 노광 장비를 시작으로 EUV 부문 부사장 등을 맡으며 15년 간 ASML에서 근무했다. 특히 빠르게 성장하는 ASML의 애플리케이션 비즈니스와 EUV 노광 장비 등 두 사업군의 비즈니스를 이끄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닐스 안데르센 이사회 위원장은 “크리스토프는 ASML의 기술과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질을 갖춘 리더”라고 높이 평가했다. 베닝크 전 CEO 역시 “ASML을 이끌 강력한 후계자를 확보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다”며 “저는 크리스토프와 긴밀히 협력해 그가 새로운 자리에서 최선의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전했다. 지정학적 긴장과 시장의 기대, 끊임없이 진화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푸케 CEO가 베닝크의 유산 속 회사의 지속 성장을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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