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Cover Story] 예술가의 시선으로 예술가의 미래를 열다

매거진

by issuemaker 2026. 10. 28. 10:51

본문

반응형

예술가의 시선으로 예술가의 미래를 열다

작가와 컬렉터의 신뢰를 이으며 기회를 넓히다
관람객의 시선에서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전시 기획


미술시장의 침체는 작품 판매의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창작을 생업으로 삼은 예술가들에게는 다음 작품을 준비할 여건과 대중을 만날 기회마저 줄어드는 현실로 이어진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품을 선보일 전시 공간뿐 아니라,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고 새로운 관람객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끌어줄 동반자다. 특히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 작품을 소개하고, 작가가 창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갤러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서양화가로서의 경험과 전시 디렉터로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작가와 컬렉터를 연결하며, 예술 감상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일상이 될 수 있도록 힘쓰는 최란아 갤러리라나(Gallery RANA) 대표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란아 갤러리라나(Gallery RANA) 대표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화폭에 담다
최란아 대표에게 미술은 특별한 계기로 다가오지 않았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이 익숙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도 어머니는 자녀들이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동해안을 돌아보거나 다양한 환경을 경험할 기회도 많이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영향을 미쳤고, 경제적으로 자립한 이후에는 자매들이 어머니와 함께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하며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을 나누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가까이 지냈던 그녀는 별다른 진로 고민 없이 서양화 전공을 선택했다. 입시를 준비하며 회화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고, 대학에서는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 안정적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졸업 후에는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노력해 온 친구들과의 차이를 따라잡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선택에는 책임과 노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도 그녀는 자녀들에게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에는 스스로 책임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최 대표는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그림은 늘 제 곁에 있었습니다. 특히 제 작품에 등장하는 붓꽃과 야생화, 풀꽃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 마당에 심어주셨던 꽃들이에요”라며 “작업할 때는 꽃의 형태와 색채를 제 방식대로 표현하고, 하나씩 그려 나가면서 화면 전체의 균형을 맞춥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구도를 정해놓기보다 그리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구성을 완성하는 것이 제 작업 방식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두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온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인정받는 일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대구의 한 아트페어에서 관람객이 작품 속 꽃과 나비의 배치에 담긴 의미를 알아봐 주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이 작품에 담으려 했던 생각이 관람객에게 온전히 전달됐다는 사실이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 대표는 익숙한 자연과 개인의 기억을 화폭에 담으며 서양화가로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갔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발전시키며 서양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란아 대표.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예술가에서 갤러리스트로, 또 다른 선택
서양화가로 활동하던 최란아 대표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관람객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생각과 작품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는 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작가 섭외와 전시 기획까지 활동을 넓혔고, 다년간 전시 총괄 디렉터로 활동하며 미술시장의 현장을 경험했다. 자신의 작품보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더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되면서, 그녀를 믿고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미술시장이 침체되면서 작가와 갤러리 모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전시 기회는 줄어드는 반면 작품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의 부담은 커졌다. 작가들이 안정적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2025년 4월 갤러리라나(Gallery RANA)를 개관했다.


  최 대표는 “작가들의 전시 일정은 최소 6개월 전부터 결정되고, 그동안 작업실 유지비와 작품 구상, 재료비 등 많은 비용을 미리 감당해야 합니다. 작품이 판매되지 않거나 여러 사정으로 판매 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하면 다음 작업을 이어가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는 또 다른 고민도 생겼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가는 동료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함께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기대와 입장이 달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각자의 역할과 약속을 분명히 하고, 서로 존중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작가의 창작 활동을 존중하면서도 작품 준비 일정과 전시 운영에 필요한 기준을 정하고, 서로 무리 없이 협력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동료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갤러리라나를 설립한 최란아 대표. (작품: 최란아 作, This is for you - 내 안의 뜰, 50호, 2026)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작가의 활동을 존중하는 갤러리의 운영 원칙
갤러리라나는 참가 작가를 직접 선정해 초대하는 방식을 운영 원칙으로 삼고 있다. 최란아 대표가 직접 작품과 작가의 활동을 살펴 초대하고, 국내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참여 작가를 늘리기보다 오랜 시간 작품을 만들어온 이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무게를 둔다.


  작가와 맺는 관계도 일반적인 전속계약과 다르다. 갤러리가 모든 활동을 독점하면 작가가 다른 곳에서 전시할 기회까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작가의 상황에 따라 에이전시나 지역별 주력 갤러리의 역할을 맡고, 다른 갤러리의 초대전과 주요 아트페어 참여는 열어두고 있다. 대신 작품 가격과 전시의 성격을 고려해 참여할 무대를 조율한다. 작품을 먼저 구입한 컬렉터와의 신뢰를 지키면서 작가의 활동 범위도 넓히려는 선택이다.


  뿐만 아니라 전시 때마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최 대표는 페어가 열리는 지역과 관람객의 동선에 맞춰 작품 구성을 미리 계획한다. 좋은 그림이라도 어떤 작품들과 함께 배치하고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따라 전시의 완성도와 관람 경험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을 준비할 때도 매 전시마다 관람객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지 생각하며, 그 과정에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믿는다.


  최 대표는 “작가들에게 페어비를 받아 운영하면 갤러리는 좀 더 안정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좋은 분들에게 연결하고 그 만남을 이어가는 제 역할이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라며 “기존의 초대 방식을 유지하며 작품의 완성도와 준비 일정에도 분명한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당장의 판매 실적보다는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작가인지 살피고, 그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38년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이어온 김종언 작가(왼쪽)와 최란아 대표는 예술에 대한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오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누구나 편안하게 작품을 만나는 전시의 가치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관람객이 그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서양화가이자 갤러리 운영자이면서 스스로도 작품을 구입하는 컬렉터로 다양한 입장을 경험한 그녀가 전시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람객의 시선이다.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최 대표는 낯선 미술 용어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 설명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프랑스 표현주의 작가 로랑 부로(Laurent Bouro)의 작품을 소개할 당시 한 관람객이 밝고 부드러운 그림을 왜 표현주의로 분류하는지 질문한 일이 있었다. 뭉크의 ‘절규’를 떠올렸던 관람객에게 그녀는 인간의 내면에는 절망뿐 아니라 행복한 감정도 존재한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후 작품의 표현 방식과 작가가 바라보는 자연을 연결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익숙한 개념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이었다.


  작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도 관람객의 선택을 존중한다. 처음 그림을 소장하려는 이들에게 무조건 큰 작품을 권하기보다 취향과 생활공간을 고려해 선택하도록 돕는다. 특히 최 대표는 전시 현장에서 작품을 소개하며 만난 관람객들이 생애 첫 컬렉션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한다.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구입한 컬렉터들이 SNS를 통해 꾸준히 응원을 보내고, 이듬해 다시 찾아와 작품을 구입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중 부산 전시에서 “생애 첫 컬렉션은 꼭 작가님 작품으로 시작하겠다”라고 약속한 컬렉터가 이듬해 대구까지 찾아와 작품을 구입하고 지금까지 응원을 이어오는 인연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대부분의 컬렉터와 전시 현장에서 작품을 소개하며 인연을 맺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이러한 관계는 더욱 소중하다. 판매 이후에도 작품 보증서와 관리에 관한 문의를 챙기며 컬렉터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최 대표는 “관람객이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듣는 일 역시 필요합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미술을 어렵게 설명하기보다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최란아 대표가 예술가와 갤러리스트로서 활동을 이어가는 데 든든한 힘이 되어준 이들은 오랜 시간 작품과 작가의 가치를 믿고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온 소중한 인연들이다.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왼쪽에서 부터) (주)삼두종합기술 최영수 대표, (주)신영에스앤피 원유건 대표, (주)위치스 고미아 대표


 

규모보다 지속성을 선택한 갤러리의 미래
최란아 대표는 포항에 마련한 공간을 거점으로 전국의 아트페어를 오가면서도 갤러리의 공간 대관이나 교육사업을 별도로 운영하지 않는다. 전시 준비와 작품 소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갤러리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자신의 작품 판매로 충당할 때도 있지만, 그녀는 지금의 방식이 함께하는 작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2026년에는 부산과 대구, 울산, 대전 등에서 전시와 아트페어 활동을 이어왔다. 남은 기간에도 울산, 경주 등에서 작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2027년에는 해외 아트페어에도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처음부터 규모가 큰 행사에 도전하기보다 현지 시장과 운영 비용을 살피며 경험을 넓힐 생각이다. 


최란아 대표가 예술가이자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의 길을 이어온 바탕에는 어머니와 자매, 배우자의 변함없는 믿음과 응원이 있었다. ⓒ 갤러리라나(Gallery RANA)


  그녀가 이러한 선택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선택을 지지해 준 어머니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이해하며 그녀의 활동을 뒷받침해 온 남편이 대표적이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동료 작가들, 이웃처럼 다정하게 찾아오는 컬렉터들, 작품과 작가를 믿고 지원하는 기업 대표들 역시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 힘이 됐다. 그녀는 이들의 신뢰에 보답하는 길이 결국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 대표는 “갤러리를 크게 확장하는 것이 제 목표는 아닙니다. 지금 함께하는 작가들이 계속 좋은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기다리는 분들과 오래 만날 수 있도록 이 공간을 지키고 싶습니다. 예술 감상이 누구에게나 부담이 아닌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예술가의 성장은 작품을 완성하는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지켜가면서도 이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최란아 대표는 그 만남을 만드는 일에서 또 다른 예술가의 역할을 발견했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작가들의 가능성으로 연결하고, 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그녀의 선택은 갤러리가 지닌 역할과 책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슈메이커 김남근 기자 issue8843@issuemaker.kr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