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역사상 첫 미국 출신 교황
‘신중한 개혁파’, 균형 잡을 인물로 평가
제267대 교황으로 미국 출신인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선출됐다. 재임 기간 사용할 즉위명은 레오 14세다. 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후 열린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를 통해 신임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는 첫 강복 메시지를 내며 “대화와 만남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모두 하나가 되어, 언제나 평화를 누리는 한 백성이 되자”고 말했다.
페루 빈민가에서 오랜 기간 사목
레오 14세 교황은 1955년 미국 시카고에서 교리교사로 활동한 프랑스·이탈리아계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7년 미국 빌라노바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2년 시카고 가톨릭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교황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했다.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은 레오 14세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일원이다. 미국 출신 교황도 최초이지만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교황을 배출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신학과 별개로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공부를 마친 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가까운 페루 북서부 추루카나스 교구에서 사목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시에 따라 2014년 페루 북서부 치클라요 교구로 파견됐다. 이 교구는 빈민가와 농촌 지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국정인 그는 페루 빈민가에서 활동하기 위해 2015년 페루 시민권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처럼 레오 14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배경에는 미국인이면서도 변방에서 사목한 그의 발자취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에서 미국인 출신 교황을 금기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첫 미국 출신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도 원만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레오 14세는 기후 위기 대응, 이민자 문제 등 글로벌 현안에서 트럼프와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뉴욕타임스’는 “레오 14세는 미국인이지만 미국 가톨릭 주류와는 거리를 둬온 인물이다. 북미 출신이지만 남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를 두고 바티칸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으로 불린다.
이후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라틴아메리카 위원회 위원장과 주교 선발 등 인사를 총괄하는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교황청 주교부는 신임 주교 선발을 관리 및 감독하는 조직으로, 교황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그는 주교 후보자 명단을 결정하는 투표단에 여성 3명을 처음으로 포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조치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레오 14세는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이면서도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간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교황으로 평가받은 프란치스코의 행보는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 진보 세력과의 갈등이 존재해왔다. 이러한 가운데 레오 14세는 교회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인물로 평가된다. 영국 BBC는 “레오 14세는 서로 다른 세계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인물”이라며 “단 네 번의 투표로 선출된 건 추기경들이 그런 평가에 동의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교계 안팎에서도 레오 14세는 보수파와 개혁파 중 한쪽 편에 서기보다 중재역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기대가 큰 것으로 전해진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새 교황명 레오 14세가 19세기 말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을 계승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레오 13세는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 조건을 보장할 필요성, 노동조합을 설립할 권리, 사유재산 인정,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책임 등을 강조했다. 라틴어로 ‘사자(獅子)’를 의미하는 ‘레오’는 강인함,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산적한 과제 속 ‘바티칸 외교’ 주목
5월 18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즉위식으로 교황 레오 14세의 공식 직무가 시작됐다. 전 세계 180여 나라에서 대표단이 참석했고, 20만 신자가 운집했다. 레오 14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도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즐겨 탔던 이동 수단인 흰색 무개차(無蓋車) ‘포프모빌(Popemobile)’을 타고 광장에 나섰다. 신도들에게 직접 인사를 한 데 이어, 바티칸으로 뻗어 있는 콘칠리아치오네 대로를 따라 늘어선 군중과도 인사를 나눴다. 갓난아이를 들어 올려 보이는 부모 앞에서 멈춰서서는 아이를 건네받고 직접 축복을 했다.
미사는 성 베드로 대성전 내 베드로 사도(초대 교황)의 무덤에 바치는 기도로 시작됐다. 약 200명의 추기경들이 일제히 늘어서 흰색 교황의 관과 제의를 걸치고 목장(牧杖)을 든 교황을 맞이했다. 새 목장엔 예수가 못 박힌 모습의 철 십자가가 달렸다. 무덤 앞에 선 그는 관을 벗고, 동방 가톨릭 총대주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 분향과 기도를 했다. 그리고 새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 전달, 복음서를 건네받으며 교황직의 공식 시작을 선언했다.
레오 14세는 선출 후 발코니 인사에서 예복인 흰색 수단 위에 붉은색 어깨 망토인 모제타를 모두 입은 전통을 따른 복장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전임 교황은 ‘화려하다’는 이유로 모제타를 착용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영국 로이터는 “레오 14세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통을 따르지만 자신이 새로운 다른 교황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개혁 성향이지만 보수적 전통도 승계하겠다는 의사표시라는 분석도 있다.
교황은 이어진 강론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레오 13세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우리는 증오·폭력·편견·차이에 대한 두려움 등 너무나 많은 불화, 또 지구 자원을 착취하고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는 경제 논리로 인한 많은 상처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배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걸어가자”고 했다. 미사 말미에는 별도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무고하고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자. 협상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와 미얀마를 지목해 언급하기도 했는데, 레오 14세는 진전이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행사에는 J.D. 밴스 미국 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교황은 미사 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각국 대표단과 인사를 나눴다.
한편 레오 14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아우구스티노회 총장 시절인 2002년, 2003년, 2005년, 2008년, 2010년 총 다섯 차례 방한했다. 2027년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WYD)에서 차기 2027년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해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가톨릭 젊은이들의 신앙 대축제인 세계청년대회는 교황과 청년들이 만나는 행사로 유명하다. 레오 14세가 세계청년대회를 위해 한국에 오면 교황의 역대 네 번째 방한으로 기록된다.
전쟁과 이민자 문제, 기후변화 등 국제사회가 끌어안은 어려운 과제 속에서 취임한 레오 14세 교황 앞에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현대 교황은 로마 가톨릭 14억 신자의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세속에서도 인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갈등하는 국가를 중재하는 외교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회 내 갈등을 중재도 중요한 문제다. 현재 가톨릭에서는 여성 신자의 가톨릭 고위직 참여, 동성 커플 축복 등 여러 사안을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새 교황이 세계적 과제에 어떤 목소리를 내고, 보수와 개혁으로 분열된 교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지 주목된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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