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수도령
- 배우의 길에서 신의 부름까지, 현대를 살아가는 무속인의 기록
- 황해도 꽃맞이굿 전수장학생, 전통의 예술을 잇는 젊은 박수(博數)
쉼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대한민국의 샤머니즘(Shamanism)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정체성의 물줄기였다. 고인돌 문화와 함께 시작됐고, 왕과 지도자가 무당의 예언을 신뢰했으며, 불교·도교·유교와 뒤섞여 민중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미신 타파 운동’과 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종교로서의 기록이 소실됐고, 사적인 종교로 인식되며 ‘무속’은 종교의 틈새로 밀려났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전통 굿이 예술 공연으로 재해석되고, 여러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소통하며 재조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인정 미비 속에서, 무속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종교’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한예종 출신의 촉망받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던 호수도령은, 오랜 고민 끝에 내림굿을 통해 신을 모셨고, 자신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사진은 신굿(내림굿) 당시의 호수도령 모습.
ⓒ 호수도령
기록되지 못한 종교, 무속을 다시 바라보다
한국의 무속은 먼 옛날, 제사의 권위가 정치와 연결되던 시대부터 시작된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도 환웅은 하늘의 신이자 샤먼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삼국사기 곳곳에는 무녀와 제천 의식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가치 아래 탄압과 통제가 이어졌으나, 민초들은 병과 삶의 고통을 위로받기 위해 여전히 무당을 찾았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에 반해 현재의 한국 무속은 종교로서의 기록을 갖지 못했다. 불교나 기독교, 유교처럼 경전이나 공식 교리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무속 지식은 스승과 제자 간 구술 전승에 의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신’이라는 프레임 아래 징벌적 단속이 이어졌고, 광복 이후에도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산업화의 논리 앞에서 무속은 구시대의 잔재로 치부되기도 했다. 굿 집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고, 무당은 ‘신내림 받은 사람’이 아닌 ‘기이한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호수도령은 “무속은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지켜낸 영적인 기록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무속이 사라져가는 이유가 단지 종교로서의 위치를 잃어서가 아니라, 기록되지 못한 채 단절되고 왜곡된 역사의 이면 때문이라고 본다. 국가가 종교로서 공인한 바 없고, 문화재적 가치로도 아직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수많은 무속 의례와 굿의 양식들이 빠르게 소실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호수도령은 이러한 흐름에 맞서고 있다. 무형문화재 제24호 황해도 꽃맞이굿의 전수장학생으로서 단절된 전통을 복원하고, 잊힌 의례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행보는 개인적 수행의 차원을 넘어, ‘사라져가는 종교의 원형’을 온몸으로 지키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 호수도령
배우의 삶에서 무속의 길로, 신이 건넨 삶의 전환점
호수도령은 어린 시절부터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신의 기운을 느끼거나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하며 자란 무속인은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게, 평범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그는 예술이라는 세계에 이끌렸다. 오랜 타국 생활을 마치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연극을 공부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고,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모두가 동경하는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그는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삶의 이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자주 찾아왔다. 예기치 못한 직감, 이유 없는 감정의 파고, 누군가의 슬픔이 자신의 것처럼 다가오는 감각. 그저 예술가의 과민함이라 치부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그 감각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공연이 끝나도, 무대의 조명이 꺼져도, 그 감흥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것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감정의 폭우처럼 쏟아지는 통증과 불면, 그리고 무력감. 주변의 권유로 처음 신당을 찾아간 그는, 무속적 관점에서 ‘신병’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배우로서의 삶을 걸어온 자신에게, ‘무당’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너무도 낯설고 버거운 것이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누름굿을 알아봤고, 해외로의 도피도 시도해 봤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쌓아온 삶과, 이제 막 손에 잡히려는 새로운 길이 눈에 밟혔다. 그때 그를 설득한 건 다름 아닌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사람을 이해하고자 했던 배우의 길도, 사람의 아픔을 마주하는 무속의 길도 결국 같은 지점에 닿아 있었다’라는 자각 말이다. 그것은 연기라는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지 못했던 어떠한 통로를, 무속이 대신 걸어가 주는 예민한 감각이었다.
결국 그는 내림굿을 통해 신을 모셨고, 자신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한예종 출신 배우에서 무속인이 된 삶, 예인의 감각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무속인의 품으로 사람의 운명을 마주하는 존재. 호수도령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예술과 무속은 결코 다른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에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호수도령의 굿에는 장단과 북소리 너머에서 전해지는 삶(生)과 죽음(死), 기원(祈願)과 위무(慰撫), 그리고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心)이 녹아있다.
ⓒ 호수도령
전승자의 길, 예인의 정신으로 무속을 새기다
호수도령은 신을 받아들이고 모신 뒤에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무속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를 마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신을 모셨다는 사실보다도 무속의 본질을 배우고 지켜내는 행위의 절박함이었다.
절박함은 눈에 띄는 결과로 빠르게 보여졌다. 호수도령은 2023년,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황해도 꽃맞이굿’의 전수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단지 굿의 기술을 배우는 과정을 넘어, 무속이 지닌 전통문화적 가치와 영적 맥락을 체화하는 수련이었다. 호수도령은 전수자로서의 길을 성실히 걷고 있으며, 앞으로 이수자의 자격까지 취득할 예정이라 전했다. 이는 무속의 맥을 잇는 사람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자처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속에 방치되어있는 무속.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호수도령은 무속을 단순한 예언이나 굿의 영역에 가두지 않았다. 그는 무속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후대에 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정의했다. 실제로 그는 블로그, SNS,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무속의 실천과 가르침을 세심하게 정리하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한 개인의 신앙 일기를 넘어, 무속이라는 거대한 전통을 디지털 시대에 맞춰 복원하는 작업이다.
“신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도리는 전통을 잇고, 기록하며, 남기는 일이지 않을까요?”
신이 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호수도령은 점사나 굿을 ‘신비한 행위’로 여긴 적이 없다. 그는 ‘신령님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는 무속의 본질이 단지 신과의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을 듣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있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는 어떤 내담자든 처음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다고 했다. 신께서 동하는지에 대한 여부다. 아무리 사연이 절박해도,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신의 뜻이 없다면, 혹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는 결코 점사나 굿을 진행하지 않는다.
“신명에서 봤을 때 이 사람의 잘못이 너무 크다거나,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면 저는 해드릴 수 없어요. 신이 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거든요.”
이는 무속인으로서 갖는 태도이자, 인간으로서 감히 넘지 않아야 할 신과의 경계선이다. 때문에 그는 누군가가 강하게 원하더라도, 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조용히 정중하게 다른 길을 안내한다고 덧붙였다.
굿을 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절대로 굿을 강권하지 않는다. 굿의 기운이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라면, 무작정 그 길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터뷰 중 그는 실제로 굿을 권하지 않고 돌려보낸 사례들을 언급하며, 무속이 누군가의 불안을 자산으로 바꾸는 장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무속이 진정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오히려 때로는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설명이었다.
호수도령은 “돈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길이 지금이 아니라면, 저는 오히려 시간을 더 갖고 오라고 해요. 당장 굿을 해서 해결될 일이면야 좋겠지만, 세상일은 그렇지 않잖아요?”라고 전한다. 내담자에게 처방을 내리는 의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기다리는 길벗이 되고자 한다는 그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 호수도령
진심으로 살아낸 삶이 무속이 된다
호수도령의 무속은 개인의 신내림으로 시작된 길이 아니다. 신과 사람 사이에서 영적인 조율을 해내는 무속인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무속이라는 문화유산을 올곧게 이어가야 할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시작됐다. 황해도 지역에 뿌리를 둔 대표적인 전통 굿 중 하나인 꽃맞이굿은 사라져가는 지역 무속문화를 복원하고 전승하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러한 무속 유산은 대중과의 거리감, 종교적 편견, 제도적 한계 속에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굿을 굿이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대도 있었죠. 지금도 무속은 여전히 어떤 경계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호수도령이 무형문화재 전수의 길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속은 누군가의 삶을 일으켜 세우는 동시에, 우리의 정신문화와 예술의 뿌리를 지켜내는 고귀한 전통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무형문화재의 전수과정은 단순한 의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다. 복잡한 절차와 엄격한 전통 규범 아래, 해당 지역의 문화적 맥락과 신앙적 상징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수행이다. 호수도령은 매회 스승의 의식을 지켜보며 꽃맞이굿의 진정한 의미와 구조, 노래와 장단, 복색과 의식의 배치를 머리와 몸에 새긴다. 이는 그가 가진 신내림의 세계와 예술로서의 무속이 만나 하나로 조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이 길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무속은 개인의 능력이나 기질만으로 완성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과 수행, 전통에 대한 경외가 하나로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도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이야말로, 그를 단순한 무속인이 아닌 ‘전통의 길 위를 걷는 예인(藝人)’으로 세상에 각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호수도령의 굿에는 울림이 있다. 그것은 장단과 북소리 너머에서 전해지는 삶(生)과 죽음(死), 기원(祈願)과 위무(慰撫), 그리고 사람을 향한 마음(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고 있다. 그것이 무속의 본래 자리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호수도령은 이렇게 말한다. ‘무속은 신기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일’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그저 그 곁에서 작은 불빛을 들고 있을 뿐’이라고. 그가 걸어가는 길은 예스럽고도 단단하다. 사람을 살피는 일, 전통을 잇는 일, 신을 모시는 일. 그 모든 일들이 엇갈리지 않고 맞물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오랫동안 이어진 그 삶의 매 순간이 한 점의 허위 없이 진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이라는 낯선 길 위에서 묵묵히 사람의 곁을 지키는 호수도령. 그는 신이 머물고, 사람이 안겨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오늘도 다시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이슈메이커 김남근 기자 issue8843@issuemaker.kr
| [히든 챔피언] 배다은·유솔지 디고잉 대표 (0) | 2025.08.01 |
|---|---|
| [Cover Story] 최영조 운동맛짐(GYM) 대표 (0) | 2025.07.29 |
| [Cover Story] 엘레브(ELEV) 클리닉 이정우 대표원장 (0) | 2025.07.07 |
| [한국의인물 - 주방 인테리어 전문기업 부문] 김명일 ㈜미크래빗 대표 (0) | 2025.07.04 |
| [People Story] 우현리 한국섬유미술가회 회장/국립강릉원주대학교 교수 (0) | 2025.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