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일치’에 성공한 만화 마니아
20년 만에 이룬 글로벌 탑티어를 향한 꿈
지난 5월 31일, 네이버의 웹툰 플랫폼 서비스인 ‘네이버웹툰’이 미국 나스닥 시장 상장 절차에 본격 착수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기업공개(IPO)를 위한 증권 신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주식 공모 가격 희망 범위를 주당 18~21달러로 제시해 상단 가격을 적용하면 상장 후 기업 가치는 26억 7,000만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대한민국 K-웹툰 세계화의 주역으로 부상할 네이버웹툰(유)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세계 엔터 산업의 중심에 선 네이버웹툰
2005년 서비스를 시작한 네이버웹툰(유)(이하 네이버웹툰)은 만화 선진국인 일본이나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웹툰 생태계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일부 마니아가 즐기는 콘텐츠로 시작해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때문에 네이버웹툰의 미국 법인이자 본사인 웹툰엔터테인먼트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다는 소식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네이버 계열사 중 첫 미국 시장 상장 사례이며, K-컬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첫 단추이기에 이번 상장은 웹툰계 외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네이버웹툰이 상장을 통해 내세운 목표는 ‘글로벌 지식재산권(IP) 프랜차이즈’다. 경쟁 상대로는 넷플릭스, 유튜브 등을 꼽았을 정도다.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에 ‘캔버스’, 일본에는 ‘인디즈’란 이름으로 알려진 네이버웹툰은 현재 150여 국에 진출, 월간 활성 이용자 수만 1억 6,900만 명(이상 지난 1분기 기준)에 이른다. 매출만 12억 8,300만 달러(이상 2023년 기준)다. 전 세계 2,400만 명 이상의 창작자를 발굴하고 5,500만 개 이상의 콘텐츠를 확보했다. 웹툰 불모지였던 해외에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전 세계 IP를 빨아들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작품 IP는 글로벌 팬덤의 기반이 됐고, 이는 새로운 엔터 산업의 탄생을 야기했다.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2차 창작물로 확대해 언어와 미디어의 장벽을 허물기도 했다. 불과 20년 만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글로벌 탑티어의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가 자리한다.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는 이번 나스닥 상장 신고서 서두에 첨부한 서한에서 “20여 년 전 네이버에서 검색 엔지니어로 일하며 부업인 웹툰을 시작했다. 웹툰을 시작한 이유는 이야기를 나누고, 창작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라며 “이번 IPO는 지난 20년간 노력의 정점인 동시에 여러모로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향후 10년간 가장 큰 히트작이 될 IP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전했다.
상장에 대한 이유 있는 자평
김준구 대표의 이러한 당찬 포부와 자평(自評)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 김 대표는 네이버웹툰을 국내 대표 콘텐츠 회사로 이끈 주역으로 2005년부터 오로지 웹툰 한길만 달려왔다. 2004년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평범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CEO(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응용화학부 출신의 인재가 만화책을 스캔해 온라인에서 유통하는 방식으로 만화 서비스를 하는 일을 본인이 하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당시 개발자로 네이버에 입사를 했던 터라 주변에서의 만류도 많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만화를 좋아했던 그였기에 선택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소장하는 만화책만 9,000여 권에 달할 정도다. 자리를 옮긴 후 스스로 ‘덕업일치’(좋아하는 일과 직업의 일치)에 성공했다고 말할 정도로 만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네이버웹툰 초기 서비스를 구축한 후 작품 발굴에 집중하며 ‘흥행 작품을 보유해야 독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고, 그래야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다’라는 자신만의 신념을 줄곧 이어나갔다.
당시 그가 고안해 낸 솔루션은 ‘도전 만화’ 시스템이었다. 현재는 서브컬처 영역이던 웹툰을 메이저 산업으로 끌어올린 주된 포인트라고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물음표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도전 만화’ 시스템을 통해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쉽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축했고, 도전 만화에서 정식 연재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통해 수많은 스타 작가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작가가 김진태, 조석, 김규삼, 기안84, 야옹이, 전선욱 등이다. 때문에 도전 만화 시스템은 만화 지망생 사이에서 ‘등용문’으로 통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그가 고안한 또 다른 솔루션은 ‘요일제’ 시스템과 네이버웹툰 창작자 수익 모델인 ‘PPS(Partners Profit Share)’다. 지금은 익숙한 시스템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퀄리티 높은 작품으로 독자의 일상 속에 웹툰 소비가 스며들 수 있도록 한 김 대표의 묘수(妙手)였다.
이러한 그의 솔루션들이 연이어 성공하자, 그가 항상 강조했던 ‘수익 구조가 좋아지면 창작 환경이 나아지고, 환경이 좋아지면 더 재미있는 웹툰이 나온다’라는 사실에 많은 이가 동조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의 ‘평등한 기회’, ‘본인 전결화’, ‘성과 중심’이라는 조직문화를 누구보다 철저히 이행하며 신망도 두텁게 쌓아갔다.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쪼는 편집자’ 캐릭터로 등장할 정도로 작가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렇게 10년 만인 2015년, 마침내 그는 웹툰&웹소설 CIC 대표에 이어 2017년에는 네이버웹툰의 대표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진정으로 웹툰 사랑하는 ‘콘텐츠 가이’
김준구 대표는 한때 ‘금발’로 파격적인 변신을 했던 때가 있었다. 2014년 영어 서비스를 출시하며 글로벌 사업에 박차를 가하던 때 돌연 금발로 염색을 한 것이다. 미국 작가들과 파트너사에게 ‘금발의 아시아인’이라고 각인시켜 미지의 시장 개척에 힘을 보태기 위한 행동이었다.
올해 김 대표는 다시 ‘흑발’로 돌아왔다. 네이버웹툰이 글로벌 시장에서 확실히 자리 잡는 데 성공했음을 시사하는 포인트다. 영어 오리지널 작품인 ‘로어 올림푸스’는 2021년부터 2년 연속 미국 3대 만화 시상식의 주요 부문을 수상했고, 미국 아마추어 작가용 플랫폼 ‘캔버스’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12만 명에 이른다. 북미 시장 진출 10년 만에 유의미한 성적표를 받았고, 이를 발판 삼아 IPO까지 노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네이버웹툰이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어쩌면 이 업을 ‘일’이 아닌 ‘좋아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지각하면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게임에 빠진 작가를 찾기 위해 게임 서버에 직접 접속해 데려오기도 할 정도로 그에게 웹툰 사업은 단순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워라밸’이 불가능한 회사지만 모두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는 스트레스 없는 회사로 만들고자 직원과 작가들 틈에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하기로도 유명하다. 작가들의 작품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출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직원 채용 시 ‘웹툰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반드시 할 정도다.
지난 2017년 서울대학교총동창회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사원 때 36년짜리 계획을 세웠어요. 처음 12년 동안은 한국 콘텐츠의 창작생태계를 만들고, 그다음 12년 동안 해외에 진출해서 이 산업의 볼륨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죠. 마지막 12년은 제가 좋아하는 분야가 메인 스트림이 될 때까지 ‘콘텐츠 가이’로서 노력할 겁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7년이 지난 현재, 그가 내뱉은 계획보다 더욱 빠르게 순항하며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수익 모델 개선이 관건
네이버웹툰의 성공적인 나스닥 시장 안착을 위해서는 손익분기점(BEP) 개선이 관건이다.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회사를 인수하며 외형 확대는 성공했지만, 상장 시 가치평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향후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나스닥 상장 대상은 네이버웹툰의 모회사인 ‘웹툰엔터테인먼트’(이하 웹툰엔터)다. 웹툰엔터는 2020년 254억 원, 2021년 510억 원, 2022년 1,089억 원의 순손실을 내며 매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웹툰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었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시장 형성’ 단계이며, 전체 콘텐츠 시장에서 웹툰에 대한 인식은 아직 높지 않다.
네이버웹툰의 주요 수익원은 플랫폼 내 유료 재화인 ‘쿠키’라는 소과금 모델이다. 우리나라는 이용자들이 쿠키를 결제하는 데 있어 거부감이 덜한 반면, 해외에서는 만화를 온라인으로 즐기는 문화 자체가 오래되지 않아 과금 모델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다. 때문에 쿠키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익 모델을 북미 시장에 그대로 도입한다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다. 다만 업계 전문가들은 ‘웹툰엔터의 수익 모델은 약하지만 북미 시장에서 웹툰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운영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웹툰 산업이 안정화에 들어선 국내와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의 성장성이 가치 평가에 긍정적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상황이다.
서민호 한국신용평가 수석 연구원은 “지금은 북미 시장에서 웹툰엔터라는 이름을 알리는 과정이라 마케팅 비용이 많이 든다.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화되면 이후에는 콘텐츠 관련 비용 정도만 나갈 것”이라며 “웹툰엔터가 현재 적자를 기록하는 것도 사업 초기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가 북미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 ‘과금 모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높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때문에 웹툰도 현재보다 친숙해지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결제를 할 것이며, 현지 작가 양성에 힘써 그들의 문화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어간다면, 인식 개선은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정호윤 한국투자증권 연구원 “네이버웹툰은 미국 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대를 중요한 장기 성장 과제로 삼아왔는데, 그간 비용 효율화 기조로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라며 “상장 이후 전략 변화와 그에 따른 성과 확인이 중요하다”라고 전망했다. 이어 “상장 후에도 네이버웹툰 콘텐츠 다양화를 비롯해 매출 성장과 수익성 개선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고, 지식재산권 활용을 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첨언했다.
이슈메이커 김남근 기자 issue884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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