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의 대표적인 ‘기술통’이자 ‘스페셜리스트’
기술에 대한 집요함과 실행력 갖춘 실용적 리더십
세계는 반도체 투자 전쟁 중이다. 미국은 인텔과 삼성전자, TSMC에 각각 26조, 9조, 17조 원의 보조금과 대출 지원을 단행했고, 일본은 TSMC에 4조 원을 지원해 공장을 유치했다. EU와 중국, 대만 역시도 반도체에 국가의 명운을 맡긴 듯하다. 우리나라 역시 반도체 산업에 26조 원의 지원을 최근 약속하며 시장 선두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새로운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삼성전자 DS부문의 인사 쇄신
반도체·팹리스(Fabless) 생태계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삼성전자’가 세운 과거의 아성에 젖어 수익성이 높은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 경쟁에서 한 발 밀리는 답답한 행태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기자가 겪는 취재현장에서 ‘대한민국 반도체는 이제 더 이상 세계 최고가 아니다’라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수치로 이 말들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되돌리기에는 늦은 것일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달 전격 단행된 삼성전자 DS부문의 인사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2년 넘게 DS부문을 이끌어온 경계현 사장이 3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나고, 전영현 부회장이 새로운 리더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2023년 기준 사상 최악의 반도체 적자를 본 삼성전자였고, 여기에 더해 인공지능 메모리 사업 분야에서도 경쟁사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정기 인사철이 아님에도 위기 돌파를 위한 극약처방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삼성전자 반도체는 지난해 15조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국제적으로 IT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며 D램 등의 메모리 사업이 함께 부진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22년 말 메모리 업계의 감산 추세 당시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아 재고 부담이 높아졌다는 점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부문의 뼈아픈 실수다. 무엇보다 HBM 분야에서 맞수인 SK하이닉스에 왕좌를 넘겨졌다는 대목과,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분야에서는 TSMC와의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거둔 2023년까지의 성적표다.
경질 아닌 계획된 용퇴(勇退)
업계에서는 이번 전영현 부회장의 인사가 경계현 사장의 부진한 실적에 책임을 물은 것이라는 시선이 강하다. 하지만 삼성전자 측에서는 ‘경질이나 좌천은 아니다’라고 강하게 선을 긋고 있다.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해 반도체의 미래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것이 삼성전자 측의 공식 입장이다. 경 사장은 올해 초 사내 경영설명회에서 경계현 사장은 반도체 사업 부문의 재도약을 위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전폭적인 쇄신을 위해서는 결국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용퇴(勇退)를 결정했다. 사실 경 사장은 지난해 이어졌던 반도체 불황을 극복하고 상승 동력을 마련해 놓은 후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했었고, 금번 인사 당시에도 용퇴에 대해 DX·DS부문 양 대표이사가 협의하고 이사회에도 사전 보고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내부적으로도 이번 인사는 메모리 시장이 호황이던 과거에 미래를 제대로 준비해 놓지 못한 전임 경영진들의 여파라고 의견이 모이는 모습이다.
한편 경 사장은 전 부회장이 맡던 미래사업기획단장과 삼성종합기술원(SAIT) 원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경 사장이 미래사업기획단장직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미래사업기획단 역시 이재용 회장이 중용하는 자리이기에 경 사장 역할이 큰 것은 여전하다”라며 “이번 경 사장과 전 부회장 인사는 윈-윈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DS부문에 사장보다 높은 부회장급 리더를 세운 것은 확실한 무게감을 실어주려는 차원으로 해석”이라며 “반도체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 부회장이 제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DS부문과 더불어 삼성 사업의 양대 축인 DX(디바이스 경험)부문 역시 한종희 부회장이 맡아 이끌고 있다.
풍부한 경험으로 검증된 ‘위기 해결사’
전영현 부회장의 DS부문 수장 취임에는 긍정의 시선이 많다. 최근까지 미래사업기획단장을 맡았을 정도로 삼성 사장단 중에서는 가장 새로운 안목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동안 삼성이 하고 있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사업 분야만 계속해서 연구해 왔기에 앞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부문의 빠른 도약에 많은 에너지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가 되고 있다.
사실 지난해까지 삼성에스디아이(SDI) 부회장 겸 이사회 의장직에 있었던 전 부회장은 퇴임 수순을 밟아가던 임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직으로 임명되며 많은 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당시 삼성전자는 ‘10년 뒤 미래 삼성의 새 먹거리를 찾는 곳’으로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했고, 이를 이끌 적임자로서 이재용 회장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2017년 갤럭시노트7 배터리 결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삼성에스디아이로 자리를 옮겼던 그가 삼성의 미래를 위해 다시 한번 해결사가 지녀야 할 능력을 선보일 무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삼성 내에서의 입지가 이렇다 보니, 이번 DS부문장 취임에 많은 기대가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 부회장의 과거 메모리 사업의 경험은 경쟁이 심화된 반도체 시장에서 차별화된 전략 수립과 이에 대한 실행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고성능 메모리와 파운드리 분야의 성장 촉진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전했다. 이어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서의 축적한 경험 역시 인공지능과 로봇, 바이오 등 미래 핵심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및 사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전 부회장의 취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가 반도체 업계를 떠난 7년 동안 시장은 인공지능용 메모리와 HBM 경쟁이 고조됐고, 파운드리 시장은 거센 지각변동으로 메모리와 로직 반도체의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의 리더십과는 다른 쇄신이 필요할 것”이라며 “전 부회장이 D램 전문가인 만큼 메모리 기술을 넘어 AI 시장의 물결을 관철(貫徹)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LG’ 출신의 ‘삼성’ 스페셜리스트
전용현 부회장은 2010년대에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반도체 신화를 일궈냈던 인물이다. 한양대 전자공학과와 KAIST 전자공학 석·박사 이후 1991년 LG반도체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전 부회장은 10년 가까이 LG에 몸담은 이후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겨 메모리사업부에서 D램 설계팀장, 개발실장을 거쳐 메모리 전략마케팅팀장, 메모리사업부장 등 전형적인 최고경영자 코스를 밟아왔다. LG 반도체 출신이 삼성의 최고경영자 코스에 진입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2017년 당시 2년 연속 적자에 머무르던 삼성SDI의 구원투수로 등판했고, 취임한 뒤 ‘반도체 1등 DNA’를 배터리 부문에 성공적으로 이식했다. 공격적인 연구개발(R&D) 확대와 품질경영을 기반으로 신성장 동력 확보와 빠른 실적 개선을 이뤄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의 성공적인 실적 반등도 주도했다.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삼성전자 내에서 대표적인 ‘기술통’이자 ‘스페셜리스트’로 불렸고, 권오현 회장의 뒤를 이을 ‘초격차의 후계자’로도 꼽혔다. 때문에 삼성전자 측에서는 이번 인사에 대해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 아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해 반도체의 미래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전 부회장에 대해 “평소 실용성을 중시하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하며 “일반적인 삼성의 최고경영자와는 다른 스타일이다. 기술에 대한 집요함과 실행력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관리’를 중시하는 기업 문화 속에 LG반도체 출신인 전 부회장의 리더십에 분명 다른 포인트가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해결해야 할 과제 산적
주사위는 던져졌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미래는 전용현 부회장의 손에 달렸다. 풀어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과거 이건희 전 회장도 위기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위기에 둘러싸였었고, 전 부회장 앞에 놓인 과제도 위기의 집합체다. 삼성의 성장을 주도했던 스마트폰 시장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위기에 놓인 반도체 사업이 주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독자 개발하고 있는 ‘마하1’을 비롯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의 성공이 관건이다. 올해 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하리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기에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HBM 경쟁력 제고과 파운드리 대형 고객사 확보, 그리고 차세대 메모리 개발에서의 초격차 지속이 전 부회장이 당면한 과제로 의견이 모이는 이유다. 이에 더해 DS부문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신망을 얻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지난해 반도체 부문의 영업적자로 성과급을 지급받지 못했고, 노사의 임금 협상은 결렬된 상태다. 4월에는 화성 사업장에서 창사 이래 첫 단체행동으로 집회가 열렸고, DS부문 직원들을 포함한 2,000여 명이 처우 개선과 투명한 성과 평가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인사에 대해 일각에서는 ‘세대교체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재계 분위기에 역행하는 인사’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전자 내부적으로는 세대교체 리스크를 떠안기보다는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고, 조직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선제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 적임자로 낙점된 인물이 바로 전용현 부회장이다. 이번 쇄신 인사로 발발한 삼성전자의 움직임이 초격차 경쟁력을 다시금 공고히 할 수 있는 묘수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슈메이커 김남근 기자 issue884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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