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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가수 김흥국

단독 인터뷰

by issuemaker 2026. 9. 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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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처럼 날아온 인생, 끝나지 않은 ‘흥’의 무대


어떤 사람의 이름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이 함께 따라붙는다. ‘김흥국’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군가는 ‘호랑나비’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월드컵 응원석의 태극기를, 또 다른 누군가는 빨간 해병대 모자를 떠올린다. 가수와 방송인, 축구를 사랑하는 열혈 응원단이자 영원한 해병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한 가지 수식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대중에게 웃음을 줬던 이미지 뒤에는 10년이 넘는 무명 생활을 버텨낸 가수의 근성과 자신의 노래를 다시 알리고 싶은 음악인의 자존심이 자리한다. 어느덧 인생의 후반전을 이야기할 나이가 됐지만 김흥국은 지나온 전성기를 추억하는 데 머물 생각이 없다. “예전에 나를 좋아했던 팬들을 다시 모시는 것이 마지막 작업”이라는 그의 말처럼 지금 김흥국의 시선은 과거가 아닌 다시 시작할 무대를 향하고 있다.


 

사진=김갑찬 기자


축구를 꿈꾸던 소년, 대한민국 대표 응원단이 되다
가수 김흥국에게 축구는 유명인이 된 뒤 생긴 취미가 아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50년 넘게 이어진 또 하나의 인생이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고 한때는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를 꿈꿨다. 집안 형편과 현실적인 문제로 선수의 길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축구를 향한 마음까지 접지는 않았다. 이후 드럼을 치고 밴드에서 활동하며 삶의 무대는 운동장에서 음악으로 옮겨갔다. 그래도 국가대표팀의 중요한 순간이면 어김없이 축구장으로 향했다. TV 앞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선수들과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목소리를 보태야 축구의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경기장을 찾는 팬을 ‘12번째 선수’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중의 함성이 선수들에게 분명 힘이 된다고 믿기에 김흥국은 반세기가 넘도록 축구와 함께 울고 웃었다.


월드컵과의 인연에는 한 번의 아쉬움이 먼저 자리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현장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싶었지만 무명가수에게 비행기표를 마련할 여유는 없었다. 4년 뒤 그의 삶은 달라져 있었다. ‘호랑나비’로 스타덤에 오른 김흥국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현장으로 향했고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홀로 대표팀을 응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후 월드컵과 김흥국의 질긴 인연도 시작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는 말할 것도 없이 평생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그렇게 여러 차례 월드컵 현장을 누비며 국가대표 경기는 그에게 단순한 스포츠 관람 이상의 의미가 됐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관중석을 가득 메운 태극기 아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했다. “선수들과 같이 호흡하는 순간에 ‘이게 애국심이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수십 년 동안 태극기를 들고 세계 곳곳의 경기장을 찾았던 김흥국이기에 그 한마디의 무게도 남달랐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대표팀뿐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하는 유소년 선수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해외 무대에서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길도 넓어졌으면 했다. 축구 행정 역시 팬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한국 축구가 이미 가진 자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경험한 선수들이 지도자로 성장해 자신들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모습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박지성과 이영표, 안정환 등 한 시대를 대표했던 선수들의 이름이 쉼 없이 이어졌다. 역대 최고의 선수를 묻자 박지성과 손흥민 사이에서 쉽게 답을 정하지 못했고 베스트11을 꼽아달라는 요청에는 과거와 현재의 선수들을 한참이나 떠올렸다. 질문 하나에도 수십 년 한국 축구의 장면이 꼬리를 물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김흥국에게 축구가 단순한 이미지나 캐릭터가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했다. 온 국민이 다시 축구로 하나 되고 대한민국이 세계를 놀라게 하는 순간, 반세기 넘게 축구장을 지켜온 김흥국이 여전히 다음 월드컵을 기다리는 이유다.

  

사진=김갑찬 기자


무명가수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앗싸~ 호랑나비
축구 이야기를 한참 이어가던 김흥국에게 다시 음악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대중에게는 방송인과 축구광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그의 본업은 여전히 가수다. 사람들이 “요즘 노래 안 하느냐”고 물을 때면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최근 선보인 ‘인생은 돌아서도 간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작사·작곡가가 가져온 곡을 자신의 이야기에 맞게 다듬는 과정에서 공동 작사에도 참여했다. 제목처럼 숱한 굴곡을 지나온 자신의 삶이 노랫말 곳곳에 겹쳐진다. “가수는 노래만 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 다른 길로 갔다”는 농담에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마음이 묻어났다. 신곡을 발표해도 방송에서 들려줄 기회가 예전 같지 않은 현실은 아쉽지만 음악을 멈출 생각은 없다. “노래는 생활”이라는 짧은 한마디면 충분했다. 축구와 방송을 비롯해 여러 영역을 오갔어도 김흥국을 세상에 알렸고 지금까지 그의 삶을 지탱한 중심에는 늘 노래가 있었다.


김흥국의 음악 인생에서 ‘호랑나비’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말, 오랜 무명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이 한 곡으로 단숨에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특유의 춤도 치밀하게 준비한 안무가 아니었다. 첫 TV 무대를 앞둔 신인가수에게 방송 현장의 반응은 냉랭했고 무용단도 코러스도 없이 홀로 무대를 채워야 했다. 가만히 서서 노래만 할 수 없었던 그는 타고난 리듬감과 축구로 다져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랑나비야 날아봐’라는 노랫말을 따라 몸을 날리고 넘어질 듯 다시 일어서자 현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후 무대마다 흥이 이끄는 대로 동작도 달라졌고 어느새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김흥국만의 춤이 됐다. 그는 ‘호랑나비’의 성공을 자신의 가창력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꼭 맞는 노래와 편곡, 리듬에 즉흥적인 춤까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라고 돌아봤다. 훗날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성공담이 됐지만 그 시작에는 무명가수의 절박함이 있었다. “오늘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각오로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낸 무대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꿨다.


역설적으로 ‘호랑나비’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가수 김흥국의 음악적 면모가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트로트나 댄스 같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했고 무엇보다 리듬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중에게 유쾌한 노래로 각인된 ‘호랑나비’ 역시 김흥국은 재즈와 펑키 리듬이 녹아 있는 곡이라고 설명한다. ‘59년 왕십리’를 이야기할 때도 편곡의 힘을 강조할 만큼 리듬과 사운드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한참 음악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오랜만에 음악 용어를 이야기하니 가수 같다”며 웃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오히려 가수 김흥국을 다시 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대표곡 이외에 다시 알려졌으면 하는 노래로는 주저 없이 ‘내게 사랑이 오면’을 꼽았다. 지금 다시 소개돼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유행에 맞춰 지난 음악을 새롭게 포장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오래된 노래라도 좋은 멜로디와 리듬은 다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호랑나비’로 한 시대를 휩쓴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가 계속 신곡을 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김흥국은 추억 속에 머문 가수가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현역 가수다.

버텨낸 사람의 힘, 다시 팬들 앞에 서기까지
김흥국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상징은 인터뷰 당일에도 쓰고 있던 빨간 모자, 해병대다. 처음부터 반드시 해병대에 가겠다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던 스물두 살 무렵 입영을 앞두고 선택한 길이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다시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한 번이면 됐다”며 웃을 정도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해병대는 그의 삶을 바꿔놓은 중요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무명 생활을 버티는 힘을 그곳에서 얻었다고 믿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매일 집을 나서며 언젠가는 자신의 노래가 알려질 것이라 스스로를 다잡았다. 어머니가 보기에는 차비와 밥값조차 빠듯한 아들이 매일 어디론가 향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서른을 넘겨서야 운명처럼 ‘호랑나비’를 만났다. 김흥국에게 해병대 정신은 자랑하기 위한 훈장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던 시간을 견디게 한 버팀목이었다. “해병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10년 넘는 무명 생활을 버텼겠느냐”는 말에는 웃음보다 진심이 짙게 묻어났다.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묻자 예상대로 ‘호랑나비’를 꼽았다. 단 한 곡이 무명가수 김흥국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러나 그는 정상에 올랐던 순간보다 그 이후의 삶을 더 오래 이야기했다. 스타가 되는 것만큼 그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겪어서다. 영원할 것 같던 인기에도 끝이 있고 사람도 돈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세월 속에서 배웠다. 화려했던 순간만큼 적잖은 굴곡도 지나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전성기를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다. 다시 제대로 준비해 좋은 기회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단순히 다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과는 달랐다. 자신을 좋아했던 팬들이 훗날 김흥국을 떠올리며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멋지게 잘 살고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여유가 생기면 어려운 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한 시대의 정상에 섰던 가수가 이제 말하는 성공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보다 마지막까지 어떤 모습으로 남느냐에 가까웠다.


인터뷰 말미, 대중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김흥국은 거창한 수식어 대신 자신을 사랑했던 팬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호랑나비’를 부르던 시절 뜨겁게 응원했던 팬들이 세월과 함께 하나둘 멀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언젠가 팬들도 다시 “역시 김흥국”이라고 말해줄 것이라는 믿음도 여전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예상대로 흘러간 적보다 뜻밖의 길에서 답을 찾은 순간이 더 많았다. 축구선수를 꿈꿨던 소년은 가수가 됐고 10년 넘는 무명 끝에 만난 한 곡으로 시대의 스타가 됐다. 이후 방송과 축구, 해병대 활동까지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여긴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빛나는 순간도 있었고 멀리 돌아가는 시간도 있었다. 그래도 김흥국은 아직 자신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넘어질 듯 다시 일어서며 결국 자기 무대를 만들어온 사람답게 다시 노래하고 다시 팬들과 만나려 한다. 한때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김흥국이 돌아왔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지금 그가 기다리는 또 하나의 무대다. 김흥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이유다.

이슈메이커 김갑찬 기자 kapchan17@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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