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불문 ‘보직 기피’ 확산
‘극한’ 내몰리는 업무 환경 요인 커
승진을 최고의 훈장으로 여기던 시대가 저물고 오히려 이를 기피하는 ‘언보싱(unbossing)’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과 같다고 해서 ‘오피스 피터팬’이자 승진을 포기했다고 해서 ‘승포자’로 불린다. 더 나아가 승진을 거부할 권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도 하다.
승진 준비할 시간에 자기 계발
요즘 기업에선 임원 승진에 실패한 ‘만년 차장’, ‘만년 부장’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기 의지로 임원 되기를 거부하는 직장인들이 늘면서다. 임원은 ‘임시직원’이라는 말처럼 매년 재계약 여부에 마음을 졸이느니, 낮은 곳에서 정년까지 조용히 다니는 게 낫다는 인식이 퍼진 탓이다.
관리직 승진을 기피하는 ‘오피스 피터팬’ 현상은 젊은 층일수록 두드러지는 추세다. 관리직을 발판 삼아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성공 지표로 여긴 과거와 달리, 2030세대는 자기 계발을 좀 더 자유롭게 하고자 관리직을 선호하지 않는다. 실제 잡코리아가 2023년 MZ세대 직장인 1,11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4.8%는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책임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43.6%)라는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어 “임원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20%),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13.3%) 등의 순이었다.
미국의 경우 다국적 채용 컨설팅 기업 ‘로버트 월터스’가 지난해 말 미국의 Z세대(1997~2012년 출생) 직장인을 대상으로 관리직 승진 희망 여부를 조사한 결과 52%가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미국 직장인 10명 중 7명은 “후배 직원을 육성하기보다 나 자신의 성장에 시간을 쓰고 싶다”고 했다. 로버트 월터스 관계자는 “회사에 헌신하며 존경받는 상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과거 직장인과 달리 (코로나 때 확산한) 재택근무 방식으로 사회에 진출한 젊은 층은 자기 능력을 개발하는 데 더 집중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관리직 기피 유독 두드러지는 일본
특히 일본은 최근 관리직 기피가 유독 두드러진 나라로 꼽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전국 직장인을 설문 조사해 보니 비(非)관리직 직장인 중 “관리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비율이 77.3%였다고 보도했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만년 사원’이 되기를 선호한다는 뜻이다. 이는 2010년대 후반 일본 정부 주도로 추진한 ‘일하는 방식 개혁’과 무관치 않다.
당시 일본 정부는 2019년 4월부터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직장인의 잔업(야근) 시간 상한을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 잡았는데, 관리자들의 업무량이 쌓이며 부담이 커진 것이 문제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력난까지 가중되자 관리직 승진자는 ‘극한 직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니혼게이자이는 이에 “직장인들에게서 ‘관리직은 사실상 벌칙’이란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일본의 관리직 기피를 부추기는 원인으로는 고질적 저임금 문제도 거론된다. 일본 내각 자료에 따르면 작년 임금 인상률은 29세 이하에서 4.2%, 30대가 3.6%, 40대 2.7%, 50대 1% 등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떨어지는 추세였다. 관리직이 되면 업무량은 크게 느는데 임금은 조금만 올라, 차라리 승진하는 대신 ‘현상 유지’를 택하겠다는 직장인이 는다는 뜻이다.
조직 전반 활력 떨어져 기업 고민 커져
중간 관리자들이 정리 해고의 과녁이 된다는 점도 글로벌 관리자 기피의 한 이유다. 미국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2023년 미국에서 해고된 직장인의 31.5%는 중간 관리자였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부진에 부닥친 2023년 3월 중간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일반 사원으로 돌아가거나 회사를 그만둬라”라고 선언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2022년 트위터(X)를 인수한 뒤 급여가 높은 관리직을 중심으로 6,000명 규모의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이처럼 미국에선 기업 차원 칼바람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존은 관리직 14,000명을 줄여 연간 약 35억 달러를 절감하려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산업에서 대규모 구조 조정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자동화와 인공지능(AI) 도입, 경제적 불확실성,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빨라지는 현실이다.
다만 승진 기피 분위기가 퍼지면 조직 전반에 활력이 떨어지고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어 기업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다. 관리직 기피 현상이 아무리 확산해도 결국 이들이 기업의 필수 인재임은 부정할 수 없어서다. 전문가들은 관리자에게 업무 자율성과 육성·기술 개발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기 부여도 중요하다. 전문 분야에서 성과를 인정받는 경로를 마련해 개인이 성장할 경로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연공 서열 중심의 인사 제도에서 벗어나 성과와 기여도 기반으로 보상 수준이 달라지도록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의 중요도나 난이도, 책임 정도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직무급제가 거론되는 이유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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