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치 중심축, 지도부 붕괴로 위기
EU 전체로 위기 번질 수 있다는 우려 제기
유럽 정치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독일과 프랑스가 지도부 붕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스의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하원에서 불신임당하며 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데 이어, 독일에서도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의회 불신임 투표로 실각했다. 두 나라의 정치적 혼란이 심화하면서 유럽연합(EU) 전체로 위기가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가 알던 독일은 사라졌다”
2024년 12월 16일(현지 시각) 독일 연방의회에서 벌어진 신임 투표에서 숄츠 총리는 찬성 207표, 반대 394표, 기권 116표로 불신임됐다. 2021년 출범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자유민주당(FDP)으로 구성된 ‘신호등 연정’ 체제가 약 3년 만에 붕괴한 것이다. 독일에서 총리가 자신에 대한 신임 여부를 의회 표결에 부친 건 서독 시절을 포함해 이번이 여섯 번째다. 이 중 세 차례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으로 이어진 바 있다.
숄츠 총리는 불신임안 가결 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청했다. 독일 헌법에 따르면 의회가 해산되면 60일 이내에 새로운 총선을 치러야 한다. 이에 따라 차기 총선은 내년 2월에 치러질 예정이다. 의회 해산이 선언돼도 숄츠 총리는 총선을 거쳐 새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이미 숄츠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 등으로 정치적·경제적 압박을 받아왔다. 특히 독일의 탈원전 정책,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문제, 경제 회복 방안 등을 둘러싼 연정 내 갈등이 이어지면서 11월 연립정부가 해체됐다. 불신임 투표는 정치적 균열의 최종적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정치적 혼란은 경제난과도 연결돼 있다. 2024년 독일의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0.1%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독일이 2025년에도 0.1%의 저성장에 그칠 것으로 경고했다. 경제의 핵심 산업인 자동차 제조업 역시 주요 시장인 중국 경기 둔화와 에너지 위기로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숄츠 총리는 연임에 도전하고 있지만 총선 승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4년 12월 14일 여론조사기관 인자(INSA) 발표에 따르면 중도 우파 성향의 CDU와 자매정당인 기독사회당(CSU) 연합은 지지율 32%로 극우 독일대안당(AfD, 19%), SPD(17%), 녹색당(13%) 등을 크게 앞섰다. 이에 따라 CDU·CSU 연합이 내세운 프리드리히 메르츠 CDU 대표가 차기 총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메르츠 대표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해 정계를 떠났다가 2018년 복귀한 뒤 당내 입지를 다져 2022년 대표에 취임했다.
프랑스, 정국 혼란 속 신용등급 하향 조정
프랑스에서도 독일과 유사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내년 예산안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갈등이 격화하던 중 프랑스 하원이 미셸 바르니에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됐고, 바르니에 총리와 내각 장관 전원이 사퇴했다. 프랑스에서 총리가 불신임으로 물러난 것은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정부 이후 62년 만이며, 바르니에 총리는 제5공화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앞서 프랑스는 지난 6~7월 총선에서 극좌·우 정당의 약진 속에 여당 연합 앙상블(ENS)이 영향력을 크게 잃어 어떤 정당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헝 의회(hung parliament)’ 상황을 맞았다. 헝 의회는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없어, 정부가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과 협력하는 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적 상태를 의미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총리 후보 지명에 난항을 겪어야 했고, 당시 신임 총리로 제4당인 공화당(LR) 소속 바르니에를 임명한 바 있다.
표결 열흘 만에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수아 바이루 민주운동당(MoDem) 대표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다만 프랑스 의회가 압도적 우위에 있는 정당 없이 여러 당으로 갈라져 정책 등을 놓고 극도로 대립하고 있어 신임 총리가 빠르게 자리를 잡아 정국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프랑스 주요 도시에서는 수만 명이 참여한 시위가 열리고 있으며, 노동조합들은 추가 파업을 예고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의회와 정부 간 갈등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친 불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정치적 혼란은 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 붕괴 이후 프랑스 국채 금리가 독일 대비 높아졌고, 프랑스 증시(CAC40)는 2023년 최고치에서 10% 넘게 하락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맞물려 경제성장률은 둔화할 가능성이 크고, 모건스탠리는 프랑스의 2025년 성장률을 0.5% 미만으로 전망했다.
유럽 정치·경제의 두 중심축인 독일과 프랑스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수많은 안보·경제적 도전 과제에 맞닥뜨린 EU 전체의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럽 싱크탱크 유럽외교협의회(ECFR)의 야나 푸글리에린 선임 펠로는 숄츠 총리의 불신임에 대해 “전통적으로 EU의 엔진 역할을 하던 국가가 내부 문제 수습에만 신경을 쓰게 됐다”며 “여러 가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한 EU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EU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보통 독일과 프랑스가 미국과의 협상을 주도했지만, 두 나라 모두 정치적 혼란에 휘말리면서 당장 트럼프 당선인을 상대할 리더십에 구멍이 뚫린 셈이다.
유럽의 문제아에서 중심국 탈바꿈한 이탈리아
한편 독일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조르자 멜로니 총리 정부가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는 이탈리아가 유럽의 중심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럽에서 통치하기 가장 힘든 나라라는 평을 받던 이탈리아의 수장이 전 세계 외교 무대에서 ‘핵심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지난 2022년 10월 취임한 멜로니 총리는 극우 성향 이탈리아형제들(FdI)을 창당하고 유럽연합 탈퇴와 반(反)이민 등 정책을 주장해 취임 당시만 해도 ‘여자 무솔리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집권 후 이민자·성 소수자 억압 등 극우 성향 정책을 펼치면서도 온건 실용주의 노선을 타며 유럽의회 내에서도 중도파 및 극우파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다. 멜로니 총리의 FdI은 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30% 가까운 득표를 해 이탈리아 정당 중 1위를 차지했다.
경제도 회복되면서 이탈리아에서 유럽의 정치 판도가 바뀌었다는 분위기가 커지는 중이다. 실제 엄청난 재정적자에 질식할 정도이던 이탈리아 경제는 EU의 지원으로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실업률은 줄고 정부는 방만한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결과 외국 기업의 투자도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고 아마존 웹 서비스도 12억 달러를 들여 이탈리아 클라우드 서비스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마테오 렌지 전 총리는 “정정 불안이 계속돼 조롱을 받았으나 불안정을 파마산 치즈, 파스, 포도주와 함께 수출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이 멜로니 총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도 친밀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머스크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엑스(X)에서 “멜로니 총리와 로맨틱한 관계는 없다”고 열애설을 해명할 정도다. 이로 인해 트럼프 당선인과도 가까워지고 있다. 멜로니 총리는 최근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 기념식에서 트럼프 당선인과 머스크 CEO를 함께 만났다. 1월 예정된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식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1874년 이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외국 정상이 참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로마 루이스대의 지오바니 오르시나 정치학과장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멜로니 총리는 머스크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트럼프-머스크의 허니문 기간이 지속되는 한 머스크는 멜로니와 트럼프 모두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정국이 안정됐다고 해서 이탈리아가 유럽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성급하다는 평가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과 달리 유럽 전체의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멜로니가 방어적일 뿐이고 EU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의 이익만 지키려 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멜로니는 유럽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범 유럽적 해법을 마련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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