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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부모’와 ‘성인 자녀’의 공생

매거진

by issuemaker 2026. 5. 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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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부모’와 ‘성인 자녀’의 공생

결혼 지연과 고령화가 만든 새로운 가족 형태
독립의 포기인가, 생존을 위한 진화인가


 과거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컬어 부르던 ‘캥거루족’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멸시가 섞여 있었다. 성장하지 못한 어른, 부모의 노후 자금을 갉아먹는 ‘등골 브레이커’라는 오명도 늘 따라붙었다. 하지만 2026년 대한민국의 캥거루족은 과거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상수로 자리 잡았다. 직장이 있어도 자발적으로 부모와 동거하는 ‘신(新)캥거루족’부터, 가사와 돌봄을 전담하며 부모의 노동을 대체하는 ‘전업자녀(專業子女)’에 이르기까지. 800만 명에 육박하는 성인 자녀들이 부모의 지붕 아래 머물며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Pixabay


독립을 ‘포기 당한’ N포세대
국무조정실의 ‘2024년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34세 청년 중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은 무려 54.4%에 달했다. 청년 10명 중 5명 이상이 독립하지 못한 채 본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서울연구원이 2024년 조사한 ‘서울시민 생애 과정 변화와 빈곤 위험’ 보고서에선 1971~75년생은 35세 때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이 18.6%에 그쳤으나 1981~86년생은 32.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원인은 기록적인 주거비 폭등과 고용 불안정이다. 사회 초년생의 평범한 월급으로는 월세와 기본 생활비를 감당하고 나면 자산 형성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버거운 수준이다. 취업 문턱마저 높아져 통계청이 발표한 2026년 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특별한 이유 없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된 19세에서 39세 사이의 청년층은 70만 명이 넘는다. 연애, 결혼, 출산을 넘어 이제는 ‘독립’마저 포기한 N포세대의 현실 속에서, 부모와의 동거는 게으름의 결과가 아닌 최소한의 방어 기제이자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 되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청년 실업률이 20%를 넘는 고용 한파 속에서 이른바 ‘전업자녀’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했다.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는 것을 넘어 자녀가 부모에게 가사와 돌봄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는 일종의 ‘가족 내 고용’ 모델이다. 외부 노동 시장에서 적절한 보상을 찾지 못한 청년들과 가사 대행이나 간병 서비스가 필요한 부모 세대가 합리적으로 타협한 결과다. 실제 일부 가정에서는 업무 범위와 시간, 월급 액수를 명시해 근로계약에 준하는 합의를 맺으며 관계를 비즈니스적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거치며 ‘패러사이트 싱글(기생 독신자)’이 급증했고, 미국은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집으로 돌아온 ‘부메랑 키즈(Boomerang Kids)’ 현상을 겪었다. 저성장과 자산 격차 심화가 만들어낸 글로벌한 구조적 필연인 것이다.

국무조정실의 ‘2024년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34세 청년 중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은 무려 54.4%에 달했다. ⓒPixabay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이들의 독립을 늦추는 것은 만혼(晩婚)과 비혼이 일상화된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다. 과거 청년들이 부모의 곁을 떠나는 가장 보편적인 계기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국가데이터처 통계에 따르면 32세 기준 1983년생 남성의 혼인율은 42.8%였던 반면, 1991년생은 24.3%로 반토막이 났다. 2024년 기준 평균 초혼 연령도 남성 33.9세, 여성 31.6세로 치솟았다. 30대 중반까지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 상황에서, 굳이 무리한 대출을 껴안고 1인 가구로 분가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생애주기의 시계 자체가 달라졌음을 지적한다. 20년 전 인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서른 살 노처녀’로 구박받던 주인공의 나이는 당시 사회 중위연령(34.8세)과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중위연령은 47.3세에 달한다. 과거 30대 중반에 짊어졌던 분가와 독립의 무게가 이제는 40대 중반에나 체감하는 과제로 10년 이상 뒤로 밀려난 것이다. 나이의 기준점이 이동한 시대에 30대 신캥거루족을 향해 과거의 잣대로 자립심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시민 생애 과정 변화와 빈곤 위험’ 보고서에서 1981~86년생의 32.1%가 부모와 동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ixabay


새로운 연착륙 안전망 구축해야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은 자신을 ‘캥(캥거루족의 줄임말)’이라 부르며 당당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청년들이다. 직장이 있으면서 자산 형성을 위해 머무는 ‘직캥’, 주거 비용에 밀려 돌아온 ‘돌캥’, 전업으로 가사를 돕는 ‘백수캥’ 등 그 형태도 다층적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홈 프로텍터(자택 경비원)’라 칭하며, 과거처럼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기생하지 않고 가정 내에서 실질적인 1인분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이들의 경제적 기여도는 막대하다. ‘직캥’들이 생활비로 보태는 월 10만~50만 원의 현금은 고정 수입이 단절된 은퇴 부모에게 든든한 연금 역할을 한다. 또한 전업자녀가 수행하는 가사 노동과 노부모 수발은 외부 인력을 고용했을 때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2026년 기준 월 450만 원 상회)을 상쇄한다. 고령층의 디지털 소외를 해결하는 ‘IT 비서’ 역할까지 고려하면, 이들은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노후 파산을 막는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신캥거루족의 독립을 늦추는 것은 만혼(晩婚)과 비혼이 일상화된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다. ⓒPixabay



  나아가 이들은 결혼 시점에 막대한 주택 자금을 부모로부터 지원받는 기혼 자녀들과 비교하며, 주거비를 공동 분담하는 자신들이 오히려 부모의 노후 자산을 지켜주고 있다고 항변한다. 능동적이고 합리적인 상호 교환 모델의 탄생이다. 다만 이들에게 둥지는 영구적인 도피처는 아니다. 전업자녀 생활이 영구적인 선택이 아니라 치열한 취업난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 효율을 극대화하는 캥 세대의 생존 전략이다.


  이러한 신캥거루족 현상은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4인 가족(부부+미혼 자녀 2명)’ 모델이 붕괴하고, ‘노년 부모와 청·중년 자녀’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생 가족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국가와 시장이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청년의 주거난과 노인의 돌봄 공백을 상호 보완하며 사적 복지망을 구축해 내고 있다.


신캥거루족 현상은 ‘노년 부모와 청·중년 자녀’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생 가족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Pixabay



  최근 ‘전업자녀’라는 저서를 출간한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전업자녀는 활용 여하에 따라 장기적, 복합적 불황에서 한국 사회를 건져낼 유력한 구원투수”라며 “지금처럼 부정적인 전업자녀로만 방치하면 미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제도가 여전히 ‘독립 세대’와 ‘기혼 가구’ 중심의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주택청약 가점제나 무주택 세대주 혜택에서 합가한 미혼 자녀들이 역차별을 받고, 청년 정책의 가구 합산 소득 기준 탓에 지원에서 탈락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청년들이 부모의 지붕 아래 머무는 것은 영구적인 도피가 아닌, 더 나은 도약을 준비하기 위한 생존의 유예 기간이다. 이들이 1인분의 사회인으로 연착륙할 수 있도록, 30대까지 길어진 실질적 자녀 부양 기간을 반영한 연말정산 인적공제 연령 상향이나, 고령 부모를 돌보는 전업자녀를 위한 가족 돌봄 수당 등 실효성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 ‘캥거루족’이라는 손가락질 대신,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가족의 구조적 변화를 사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연대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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