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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대계 기업’ 꿈 가로막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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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suemaker 2026. 1. 1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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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대계 기업’ 꿈 가로막는 벽

세계 최고 수준 징벌적 과세, 자본 유출 부추겨
‘낡은 틀’ 깨야 한다는 지적 이어져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상속세와의 전쟁’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한국의 상속세 명목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여기에 최대 주주가 주식을 상속할 때 적용되는 20%의 할증 과세를 더하면 실제 최고세율은 60%에 달한다. 이는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Pixabay


‘부의 재분배’ 명분 아래 26년간 요지부동
‘100년 기업’ 육성의 필요성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현실의 징벌적 상속세제 앞에서는 가업 승계가 번번이 좌초되고 만다. 2025년에도 정치권과 경제계를 중심으로 상속세 개편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과 세수 감소 우려에 부딪혀 끝내 무산됐다.


  한국의 기형적인 고율 상속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뿌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조선상속세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1950년 제정된 상속세법은 최고세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이는 식민 지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틈타 축적된 부를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국가가 환수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또한, 소득 파악이 어려웠던 시절, 재산이 드러나는 상속 시점에 세금을 걷는 것이 정부 입장에서는 가장 확실한 세수 확보 수단이기도 했다.


  이후 산업화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경제 성장을 위한 재정 수요와 국방비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고율 기조가 유지됐다. 잠시 낮아졌던 세율은 1997년 외환위기(IMF)를 거치며 다시 강화됐다. 심화된 소득 양극화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1999년 최고세율이 50%로 상향 조정되었고, 이 틀은 2000년 1월부터 현재까지 26년째 요지부동이다. 과거에는 탈세와 정경유착 등 자산 형성 과정에 대한 불신이 컸기에 징벌적 과세가 정당성을 얻었으나, 금융실명제 도입 등으로 자산 형성 과정의 투명성이 크게 높아진 지금의 현실과는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낡은 상속세 체계의 부작용은 기업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Pixabay


  이러한 낡은 상속세 체계의 부작용은 기업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 기업의 평균 수명은 약 12년에 불과하며, 코스피 상장기업조차 평균 존속 기간이 33년에 그친다. 수만 개의 100년 기업을 보유한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기업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셈이다. 국내 100년 기업은 2024년 기준 고작 16곳뿐이다.


  과도한 상속세는 건실한 기업마저 매각으로 내몰고 있다. 그간 여러 탄탄한 중견기업들이 막대한 상속세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사모펀드(PEF)나 대기업에 경영권을 매각했는데, 이는 단순히 소유주가 바뀌는 문제를 넘어, 단기 수익을 쫓는 사모펀드의 특성상 인력 구조조정과 기술 투자의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기업들이 고의로 자산 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현상도 목격되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중소기업 CEO의 30% 이상이 60대 이상일 정도로 고령화가 진행됐지만, 절반 이상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흑자 기업임에도 “세금 내느니 차라리 문을 닫겠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현장에서 터져 나온다. 이처럼 기업들이 꼽는 최대 경영 리스크는 단연 세금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서도 응답 기업의 65.3%가 가업 승계의 가장 큰 걸림돌로 ‘세 부담’을 지목했다. 정부가 이러한 가업 포기를 막기 위해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매출 5,000억 원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최대 600억 원까지 공제해 주지만, 사후 관리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상속 후 5년간 고용 90% 이상 유지, 업종 및 자산 구조 유지 등의 조건은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서 기업의 손발을 묶는 족쇄가 된다. 실제로 연간 활용 건수가 1만 건이 넘는 독일과 달리, 한국은 100여 건에 불과한 실정이 이를 방증한다.


 

2025년에도 상속세 개편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과 세수 감소 우려에 부딪혀 끝내 무산됐다. ⓒ국회



멈춰선 정치권 논의
하지만 정치권의 시계는 여전히 멈춰 서 있다. 정부가 2025년 9월 국회에 제출한 ‘2025년 세법 개정안’이 상당 부분 여야 합의로 수정 의결됐지만, 상속세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배우자 상속 공제 확대, 유산취득세 전환 등을 포함한 초기 개편안들이 논의 과정에서 진전되지 못하면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초 상속세 개편 논의는 이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 간담회에서 언급하며 속도가 붙는 듯 보였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간담회에서 “집주인이 사망하고 남은 가족들이 돈이 없으니까 집을 팔고 떠나야 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며 현행 일괄공제 5억 원, 배우자공제 5억 원을 각각 8억 원, 10억 원으로 확대해 총 18억 원까지 배우자가 상속세를 물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상속세 공제 한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기재위 산하 조세소위원회도 공제 항목을 중심으로 상속세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했지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논의에 진전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세수 감소’ 우려다. 지난 정부에서 대규모 세수 펑크가 발생한 데다 상속세마저 깎아주면 재정 건전성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발목을 잡았다. 정치적 셈법도 작용했다. 여당의 지지 기반인 진보 시민단체들은 지난 정부에서 도입된 혼인·출산 증여공제 확대도 부자 감세라고 주장하며 상속세 완화 움직임에도 제동을 걸었다. 부의 대물림을 심화시킨다는 이념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유산취득세 전환과 공제 한도 상향이라는 상속세 개편은 장기 과제로 밀려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현재 상속세제가) 불합리적 측면이 있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 하다”면서도 전면 개편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


  해외 선진국들은 실용적인 접근을 택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상속세율을 50%로 높이자는 ‘슈퍼리치 상속세’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78.3%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 소수 부유층을 겨냥한 과세가 자본 유출을 초래해 결국 국가 경제 전체에 해가 될 걸로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캐나다, 호주 등은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상속받은 자산을 처분할 때 과세)를 도입해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돕고 있다.


  한국도 상속세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상속세는 더 이상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2023년 기준 상속세수는 전체 국세의 2.5%에 불과해 실질적인 재분배 효과는 미미한 반면, 고액 자산가의 해외 이탈과 기업 투자 위축이라는 부작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가업상속공제의 요건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완화하고, 적용 대상을 대폭 확대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유산취득세’로의 전환은 물론, 상속 시점이 아닌 자산 처분 시점에 과세하는 ‘자본이득세’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독일의 ‘이원재단 제도’ 또한 유의미한 대안이다. 가족재단이 경영권을 갖고, 공익재단이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를 통해 경영의 안정성과 사회적 기여를 동시에 달성하는 모델이다.


  상속세 완화는 특정 계층을 위한 특혜가 아니라, 기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인프라 투자다.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기고, 투자가 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 ‘부자 감세’라는 낡은 프레임을 넘어, 100년 기업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부의 선순환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확실한 유산일 것이다. 정치권과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골든타임을 허비하지 않고 합리적인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할 때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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