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상 석권한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토니상 석권한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독특한 스토리와 한국적 디테일로 브로드웨이 사로잡아
한국 초연 창작뮤지컬 첫 토니상 수상 쾌거
한국 창작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미국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을 거머쥐면서 한류 콘텐츠 역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 6월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작품상과 극본상, 작사·작곡상, 무대디자인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 상을 석권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 비결은?
매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올린 신작들이 경쟁하는 토니상은 미국 연극·뮤지컬 업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공식 명칭은 ‘앙투아네트 페리 브로드웨이 공연 우수상’이지만 토니상을 주관하는 아메리칸시어터윙(ATW) 공동설립자인 마리 앙투아네트 페리의 별명을 따 토니상으로 불린다. 토니상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이 주요 부문에 이름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년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수많은 작품 중 최고로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창작한 ‘어쩌면 해피엔딩’은 해외 제작진과 배우진으로 지난해 11월부터 1천석 규모의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오픈런(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무기한 상연)’ 형태로 공연하고 있다. 박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브로드웨이 커뮤니티가 우리를 받아들여 준 것에 정말 감사하다”라고 감격을 표현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서 2016년 약 300석 규모의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됐으며, 한국뮤지컬어워즈 6관왕에 오르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영어판 제작을 거쳐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정식 개막하며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작품에서 올리버의 주인을 찾아 두 로봇은 제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크리스천 루이스 평론가는 미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서 “어떤 면에서는 신선하고 현대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정형화된 이 뮤지컬은 로맨틱 코미디의 은유와 장르적 관습을 자의식적으로 재해석해 재치있게 풀어낸다”고 호평했다. 이처럼 인공지능(AI) 로봇이라는 참신한 소재에 사랑이라는 보편의 감정을 전달하면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았다는 평가다. LA타임스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실제 사건이나 기존 음악, 자료에 기반하지 않은 작품”이라며 “그 무모한 독창성이 가장 큰 장점이 됐다”고 짚었다. 이어 “(배경이 되는)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생명체가 화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이라고 했다. 지난해 토니상 조명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김하나 씨는 “작년부터 브로드웨이에 작품 내용이 좋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로봇을 통해 인간의 유한한 삶을 얘기하는 보편적인 주제가 통한 것 같다”고 전했다.
두 로봇의 감정선에 매료된 관객들은 스스로를 ‘반딧불이들(fireflies)’로 칭하며 열성적인 현지 팬덤을 형성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 출입구에는 배우들을 기다리는 팬들로 장사진을 쳤을 정도로 전해진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는 이용자 1,900여 명이 공연 후기를 나누고 영상을 제작하는 2차 창작 활동에 나서고 있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는 수상 직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연을 응원해준 반딧불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K-뮤지컬 지속 가능한 성장 위한 과제는
이번 토니상 수상에는 극본상과 작사·작곡상을 동시에 수상한 ‘윌휴 콤비’의 공동 창작 방식도 힘을 발휘했다는 평가다. 윌 애런슨과 박천휴, 이른바 ‘윌휴’ 콤비는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동시에 대본을 쓰고, 음악과 이야기를 함께 구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어 대본은 공동 집필하고, ‘윌’이 작곡을, ‘휴’가 한국어 가사를 맡는 방식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두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브로드웨이 현지 정서에 맞는 언어와 감정으로 변환됐다는 평가다.
한국적인 디테일을 살리면서도 브로드웨이 스타일에 맞게 오리지널 버전을 각색한 점도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 ‘제주(Jeju)’와 ‘화분(Hwaboon)’ 같은 표현은 무대 화면에 한국어로 노출되었는데, 특히 ‘화분’은 주인공 올리버의 내면을 반영하는 상징물로 한국어 고유의 리듬과 정서를 유지했다. 박천휴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작품에 대해 “한국의 인디팝과 미국 재즈, 현대 클래식 음악, 전통적인 브로드웨이를 융합하려고 노력했다”며 “모든 감성이 어우러진 ‘멜팅팟’(용광로)과도 같다”라고 밝혔다.
한편 한국판이 서정성과 내면의 감정을 강조했다면 브로드웨이판은 재즈풍 음악과 미래적인 무대를 통해 보다 세련되게 변모했다. 김소정 뮤지컬 평론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무대가 따뜻하고 서정적이었다면, 브로드웨이는 스타일리시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로 재해석됐다”고 설명했다. 브로드웨이 버전은 재즈 보컬 캐릭터 ‘길 브렌틀리’가 새롭게 등장하고, 브라스 편성이 확대됐다.
이처럼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의 핵심에는 치밀하게 준비된 현지화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 작품을 단순히 해외 무대에 올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무대를 목표로 세심한 설계와 과감한 투자가 이어진 결과라는 진단이다. 이는 그만큼 국내 뮤지컬 제작 역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뮤지컬 평론가 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소극장에서 시작한 창작 뮤지컬이 진입 장벽이 높은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려 토니상까지 받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뮤지컬계도 반색했다. 한국뮤지컬협회는 성명을 내어 “이번 성과를 계기로 한국 창작 뮤지컬은 더욱 발전하며 해외 진출의 길을 넓히고 K-콘텐츠 산업의 차세대 주력군으로 부상할 것”이라며 “업계 종사자 및 모든 관객들과 함께 오늘의 쾌거를 기쁜 마음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간 국내 창작진들은 뮤지컬 본고장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역량을 시험해왔다. 앞서 오디컴퍼니 대표 신춘수 프로듀서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브로드웨이에서 단독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지난해 ‘위대한 개츠비’를 제작했고, ‘마리 퀴리'’ 지난해 한국 창작뮤지컬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프로덕션으로 장기 공연했다. 한국 K-팝을 소재로 한 뮤지컬 ‘K팝’은 2022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이어 지난해 토니상 시상식에선 ‘위대한 개츠비’의 린다 조 씨가 의상디자인상을, 뮤지컬 ‘아웃사이더스’의 김하나 씨가 조명상을 각각 받아 브로드웨이에 한인 창작자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국내 뮤지컬의 해외 진출이 가속할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한다. 다만 새로운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과제로 꼽힌다. ‘어쩌면 해피엔딩’도 2016년 초연된 작품으로, 최근 들어 대학로 소극장 임대료 문제, 제작 환경 악화 등 구조적 한계가 쌓여 창작 의욕 자체가 꺾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뮤지컬 시장이 대중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된다. 높은 티켓 가격이 대중적인 저변을 넓히는데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티켓 판매액을 예매 수로 나눈 티켓 1매당 평균 판매액은 59,392원으로 전년보다 4.2% 높아졌다. 비싼 티켓값은 일반인들에게 높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고비용 구조 개선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야 K-뮤지컬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슈메이커 손보승 기자 rounders23@issuemaker.kr